[횡설수설/홍찬식]야간집회의 유혹

  • 입력 2009년 3월 14일 02시 58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 ‘타올라라 검’에는 19세기 일본 마을의 오랜 풍속이 소개된다. 1년 중 정해진 날짜가 되면 젊은 남녀들이 칠흑 같은 밤에 사원으로 모여든다. 주변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약속된 신호가 떨어지면 남녀는 곁에 있는 상대와 성(性)관계를 갖는다. 이와 비슷한 게 유럽에서 발달한 가면 축제다. 현대에 들어와 관광 상품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가면을 써서 신분을 감추고 평소 억눌렸던 욕망을 분출하는 일탈의 기회로 이용됐던 것이다.

▷밤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 도덕관념을 느슨하게 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쉽게 한다. 어둠이 커다란 가면이 되어 익명의 그늘을 제공하는 탓이 크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집회 때 시위 장소와 그 주변이 무법천지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환한 대낮이었다 해도 시위대가 경찰관을 집단폭행하고 경찰차를 부쉈을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야간 시위는 과격해지기 쉽고 이 과정에서 불법과 폭력이 빚어질 수 있어서다. 이런 내용을 존치한 현행 집시법은 1989년 민주화 정치세력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른바 진보나 좌파 단체들의 집회는 야간에 집중되고 있다. 오후 늦게 시작해 어두워지면 촛불을 드는 식이다. ‘문화행사’라고 우기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건 집회 참가자들이 더 잘 안다.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야간집회를 고집하는 것은 밤의 익명성과 선동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촛불집회로 몇 차례 ‘흥행’에 성공했던 기억이 야간집회의 유혹을 키웠다고 할 것이다.

▷이들은 한술 더 떠 야간집회 금지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위헌 제청에 따라 그제 헌법재판소는 공개변론까지 열었다. 기어이 야간집회를 합법화하려는 태세다. 그렇게까지 해서 뭘 이루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다. ‘진보’라고 하면 대개는 밝고 양심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데도 밝은 낮을 놔두고 어두운 밤으로 숨어드는 ‘진보’라면 비겁하다. 어둠을 걷어내면 맨얼굴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두려운 것일까. 이런 진보는 불법과 폭력에 의존하는 가짜 진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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