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

  • 입력 2009년 1월 22일 14시 29분


[로봇격투기대회의 역사]

전류는 저항이 작은 곳으로 흐르고 정보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흐른다.

2001년, 집단지성이 만드는 무료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등장했다. 그 당시만 해도 위키피디아가 48년 후 시민들의 삶에 이토록 깊숙이 녹아들 줄은 몰랐다. 사이버스페이스를 돌아다니는 가상로봇이 인터넷 상의 정보를 수집하고 위키 형태로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위키피디아의 정보량이 급속도로 늘었다. 2049년 현재 단일 사이트 중 최다 정보량를 자랑하는 위키피디아는 웹 4.0 과 웹 5.0 시대를 거치면서 사용자 인터페이스 혁신에 주력해왔다.

로봇격투기 대회 '배틀원 2049'에 참가하는 로봇들이 <로보사피엔스 인터뷰>의 초대 손님으로 결정되었다. <보노보>가 이 대회 메인 스폰서 겸 주관 방송국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배틀원'의 모든 걸 찾아."

<보노보> 개국 축하쇼를 마치고 귀가한 로봇MC 남은 현관에서 자신을 맞는 도우미 로봇 '웃겨봐'에게 '배틀원' 검색을 지시했다.

'웃겨봐'는 가정 도우미의 기본적인 업무 외에 개그 소재 발굴과 프로그램 모니터링 그리고 자료정리까지 도맡았다. 로봇MC 남이 귀가하면, '웃겨봐'는 미디오스피어에서 수집한 개그소재부터 보고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긴급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웃겨봐'의 배에 달린 모니터에서 배틀원의 로봇격투 명장면이 먼저 잡혔다. 그리고 위키피디아 버전 12.5에서 찾은 '배틀원'에 관한 정보가 거실 벽에 뜨고 '웃겨봐'의 코믹한 인공 목소리로도 낭독되었다.

[위키피디아 12.5] 검색어: 배틀원

<정의>

배틀원(BattleOne)은 2040년부터 시작된 전지구적 이족보행로봇격투기대회다. 인간들의 이종격투기대회를 본 따 만든 배틀원은 두 발로 걷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출전하여 죽음신호(death signal)를 낼 때까지 대결한다. 이 대회는 '첨단 지능로봇기술과 엔터테인먼트를 접목하여 인간 공존형 휴머노이드 로봇의 실용화 가능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인간과 로봇이 함께 사는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휴머노이드로봇연맹과 특별시연합 로보틱스학회의 공동주관 하에 매년 특별시를 순회하며 열린다.

<역사>

2002년 2월 동경의 미래과학관에서 개최된 휴머노이드 로봇격투기대회 '로보원'(RoboOne)이 그 효시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이족보행로봇격투기대회가 열리자 휴머노이드로봇연맹이 모든 대회를 규합하여 2025년 전지국적인 로봇 격투기대회 '배틀월드'를 선보였다. '배틀월드'는 혼다와 도요다, 제록스 등의 지속적인 후원과 휴머노이드로봇의 화려한 격투기술에 힘입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40년 대리전 성격의 국제시합이 전면 금지되면서, 로봇격투기대회도 국가 단위 시합에서 지금과 같은 개인 단위 시합으로 바뀌었다. '배틀원'이란 새로운 대회명도 확정되었다. 2042년부터는 지구에서 벌이는 시합 외에 우주 공간에서 대결하는 시합이 추가되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2002년에는 참가 로봇이 30개에 불과했지만, 2048년 현재 2만 3천 팀이 초청후보 로봇으로 등록을 마쳤다.

<경기규칙 및 자격요건>

배틀원은 특별시에서 매년 벌이는 지구전과 2년마다 우주 공간으로 나가서 싸우는 우주전으로 나뉜다. 지구전은 개인전과 단체전 그리고 상대로봇이 죽음신호를 발생할 때까지 싸우는 '데스 매치'로 나뉜다. 개인전은 로봇의 등이……

로봇MC 남이 갑자기 오른손을 들었다. '웃겨봐'가 설명을 멈추고 로봇MC 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스 매치? 죽음의 시합? 대충 감은 잡히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네. 로봇들의 데스 매치가 뭐야?"

'웃겨봐'가 '데스 매치' 정보로 화면을 이동했다.

[위키피디아 12.5] 검색어: 데스 매치

<정의>

'데스 매치'는 이족보행로봇격투기대회 '배틀원'의 경기 방식 중 하나다. 로봇의 무게중심에 부착된 '생존 모니터링 칩'이 '죽음 신호'를 낼 때까지 격투기 시합을 벌이는 경기 방식이다. '배틀원'에서 최고 인기 종목이며 우승 로봇에게 돌아가는 상금도 가장 많다.

연 20회 이상 치러진 각종 로봇격투기대회 및 평가전과 친선 경기 성적, 최근 3년 동안의 '배틀원' 성적, 격투로봇비평가협회의 평점, 특별시민들의 인기도 등을 바탕으로 8개 이상 32개 이하의 로봇이 '배틀원'에 초청된다. 대회 초청 로봇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린다. 배틀원 우승 로봇 팀에게는 50억 원 상당의 우승상금과 이족보행 로봇 연구를 위한 연구비가 매년 10억 원 씩 10년간 지원된다.

<로봇 참가 조건>

[1] 개인전, 단체전과는 달리, 데스 매치의 경우 경량급, 중량급, 초중량급 구분이 없다. 키는 3미터 이하, 사지간격(손과 발을 최대한 뻗었을 때 손끝과 발끝 네 곳 중 가장 긴 길이)은 5미터 이하, 중량은 500킬로그램 이하, 발바닥 최대길이 50센티미터 이하의 이족보행로봇만 참가가 가능하다. 대회 초청 로봇은 휴머노이드로봇연맹이 인증한 생존 모니터링 칩을 반드시 장착해야 한다.

[2] 아래 세 가지 동작 체크를 통과한 로봇을 이족보행로봇으로 정의하며 출전 자격이 주어진다. (1) 10초 이내에 10보 이상 보행할 수 있을 것. 보행 시 한쪽 다리는 반드시 지면에서 떨어져야 함. (2) 3초 이내에 180도 회전을 할 수 있을 것. 이때 한쪽다리는 반드시 지면에서 떨어져야 함. (3) 선 상태에서 넘어지고 전¤후 방향으로 다시 일어나 스스로 기립할 수 있을 것.

[3] 톱니바퀴 등 부착식 무기 장착은 가능하며 로켓포 등 발사식 무기는 사용할 수 없다.

[4] 무선 및 유선으로 조종되는 로봇은 참가할 수 없으며, 경기 중 방사성 물질 등 인간에게 유해한 물질을 분출할 가능성이 있는 로봇은 출전을 금지한다.

[5] 로봇은 시합환경(빛, 소리, 전파)을 고려하여 강한 소음, 액체/기체 분말 등을 분사하는 것을 금지하며, 흡인/흡착장치를 발바닥에 설치하는 것을 금지한다.

<경기 규칙>

[1] 가로 세로 10미터의 경기장에서 격투기 시합을 벌인다.

[2] 전자 사운드와 함께 매 라운드가 시작되며 3분씩 5라운드 동안 진행된다.

[3] 상대 로봇의 생존 모니터링 칩이 '죽음신호'를 내면, 이것을 로봇의 사망으로 간주하 고 경기를 마친다.

[4] 5라운드 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연장전을 시행한다.

[5] 연장전은 두 로봇이 1미터 이내로 마주선 후, 번갈아 한 번 씩 공격을 가하고 이때 죽음신호를 먼저 내는 로봇이 진 것으로 간주한다. 상대 로봇이 공격하는 동안 방어할 수는 있지만 공격할 수는 없다.

[6] 각 팀은 각 라운드에 한 차례씩 작전 및 정비시간을 심판에게 요청할 수 있으며, 이때 휴머노이드로봇연맹이 정한 기준에 따라 프로그램 업데이트와 부품교체가 가능하다.

<배틀원이 배출한 스타들>

배틀원이 전지구적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배출한 스타 로봇들이 많다. 카네기멜론대학교 로봇공학자 팀이 만든 격투로봇 '킹 모라벡'은 '배틀월드'를 5년이나 석권하고, 2040년부터 3회 연속 배틀원 우승을 차지하면서 휴머노이드 격투로봇의 전설이 되었다. 혼다에서 만든 '건담 29'는 애니메이션의 고전 건담의 캐릭터를 본 딴 로봇으로, 화려한 유도 기술과 가라데 공격으로 인기가 높다. 베틀린에서 만든...

"하암!"

로봇MC 남이 하회탈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하품을 해댔다. 흥미를 잃은 듯 나머지 정보를 대충대충 빨리 넘겼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데일리 프로그램 <로봇만만> 일주일 분량을 한꺼번에 녹화할 예정이었다. "설날엔 로봇도 좀 쉬자고요! 오사카에서 딱 사흘만!" 로봇MC 남의 농담이 미디오스피어의 '말말말' 코너에 으뜸으로 실렸다.

'웃겨봐'는 위키피디아 '데스 매치' 정보의 마지막 화면을 끄지도 못한 채 서둘러 침실로 들어갔다. 로봇MC 남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침대를 덥혀야 하는 것이다. 닷새 전, '웃겨봐'가 부엌 청소에 바빠서 로봇MC 남이 누운 후에야 침대온도 조절을 했더니, '침대 관리 소홀'로 경고조치를 당했다. 경고조치 2회를 당한 도우미로봇은 <보노보>를 비롯하여 로봇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채널 접근이 금지된다.

'웃겨봐'가 끄지 않은 화면 마지막 줄에 이런 문장이 홀로 또렷했다.

로봇기술의 보급과 건전한 경쟁을 위하여, '배틀원'에 참가하는 로봇의 모든 기술정보는 반드시 인류에 공개되어야 한다.

● 알립니다 :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먼 시계공’은 지면 게재일 전날 오후 2시부터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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