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23년차 고시생’의 쓸쓸한 죽음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혼자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지난해 추석 때 동생을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가다니….”

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복지병원 장례식장. 23년 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고대하던 합격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동생 류모(45) 씨의 영정을 끌어안고 형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류 씨가 숨진 채 발견된 것은 8일 오후 2시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D고시원 작은 방. 깨끗이 정돈된 책상 위에는 수험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 소화제와 감기약, 혈압을 수시로 기록해 놓은 수첩이 있었다. 살림이라곤 옷장과 책상, 라디오 1대가 전부였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류 씨의 몸에서 타살이나 자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자연사일 가능성이 크다”며 “숨진 지 열흘 정도 된 것 같다”고 전했다.

류 씨는 법관을 꿈꾸던 수재였다. 빈소에서 만난 류 씨의 동창 A(45) 씨는 “고교 연합고사 때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똑똑한 친구였다”고 했다. 그는 전북 익산의 명문고를 졸업한 뒤 서울의 한 명문대 법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류 씨는 가족과 친구들의 기대주였다. 하지만 1차 관문은 세 번이나 뚫었지만 2차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지난해부터 류 씨는 법무사 시험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달 셋째 형에게 전화를 걸어 “법무사 시험이 너무 힘들어 불안하다”고 말한 것이 그가 가족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류 씨의 영정은 15년 전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 영정 앞에서 첫째 형은 “저 때 이후로 동생이 휴가 한 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 결혼도 미루고 고시원 안에서 공부만 하더니 결국 빛을 못 보고 떠나간다”고 안타까워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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