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민심은 현장에 있다

  • 입력 2008년 6월 8일 19시 57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소신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소신의 밑바닥에는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소통의 정치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에 있는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무력 침공한 데서 비롯됐다. 대처는 국가 위신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반격에 나선다. 실패하면 내각 총사퇴까지 감수해야 할 정도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전쟁에서 첫 영국인 전사자가 나왔다. 그녀는 내각회의를 주재하던 중이었다. 대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머리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총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박지향 ‘중간은 없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반전 여론이 누그러졌다. 국민들이 대처의 소신에 진정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대처는 전사자 250명의 유가족에게 일일이 친필로 위로 편지를 써 보냈다. 국가원수가 아니라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서 유족의 아픈 마음을 위로했다. 이런 소통의 정치 덕에 “왜 영국의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느냐”던 여론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국가가 지켜준다”는 신뢰로 바뀌었다.

모름지기 국가지도자라면 대처처럼 국민에게 감동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일관성’과 ‘진정성’임을 그녀의 정치 인생이 보여주고 있다.

‘정권은 민심이라는 물 위에 뜬 배와 같다. 민심이라는 물을 얻어 수위가 높으면 바닥에 있는 바위들이 아무리 커도 배가 안전하게 나가지만 민심을 잃어 수위가 낮아지면 있는 줄도 몰랐던 바위들이 배를 위협하게 된다.’(복거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각하다. 이 정부 탄생에 협조적이었던 사람들마저 ‘당신 혼자 잘해 봐’라며 돌아섰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일관성’과 ‘진정성’이 결여된 리더십 때문이다.

주말 연달아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의 말은 수시로 바뀌었다. “쇠고기 재협상은 없다”(6일 불교계 지도자 오찬)고 했다가 이튿날 기독교 원로들과 만났을 때는 “미국 측과 재협상에 준하는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촛불의 배후를 밝히라고 했다가 “촛불시위가 세상을 밝게 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7일)고 했다. “참여정부에서 처리했으면 말썽 안 났을 것”(7일 기독교 원로 대화)이라는 말도 ‘남 탓하기’로 들린다.

문제는 ‘쇠고기’ 때문에 불거졌지만 성난 민심의 밑바닥에는 소통이 단절된 최고경영자(CEO)형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을 위한다’면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아파하는 대신 잘사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부추겼다. 그런 위선에 염증을 느낀 국민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앞세운 이 대통령이 진정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대통령을 지지했던 서민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 민심을 듣겠다며 각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미복(微服)을 하고 잠행(潛行)을 해서라도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 시장통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창시절 노점상을 전전했던 대통령이니만큼 현장을 살피고 나면 요즘 서민이 느끼는 고통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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