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산업은행 총재 수난사

  • 입력 2008년 5월 8일 03시 00분


김창록 한국산업은행 총재로서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3월 말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산은 총재라는 직함을 권위주의의 상징인 것처럼 질책했을 때 항변도 못하고 감수해야 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빼고 국내 은행 가운데 유독 산은만 1인자를 총재로 부르는 관행이 남아 있다. 한국산업은행법 9조에 그렇게 규정돼 있다. 산은법이 1953년 제정된 이래 15차례나 개정됐지만 역대 총재들은 총재라는 직명(職名)을 손대지 않았다. 다른 은행보다는 격이 높다는 우월의식일 수도 있고, 시쳇말로 폼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산은은 국내 자본 축적이 빈약했던 1960, 70년대에 정부를 대신해 기업에 자금을 공급해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기여했다. 외환위기 때는 자금난을 겪는 기업을 상대로 출자전환을 주도해 금융시스템을 지켜내는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산은의 신용은 곧 대한민국 정부의 신용이다.

그런 산은이 끝내 민영화라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은 총재라는 직함에서 보듯 자율 개혁을 소홀히 한 탓이 크다. 아무리 배짱 있는 실무자라도 감히 총재 직함을 바꾸자는 건의를 하기는 힘들다. 역대 총재 중 누군가가 정부와 상의해 은행장으로 격을 낮추는 결단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금융시장의 변화를 예견해 민간과 충돌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아내고 조직을 바꿨다면 금융계의 공룡이란 비아냥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산은 총재는 순수 연봉만 7억 원이 넘어 국책은행장 중에서도 최고 알짜로 꼽힌다. 재무부 관료 출신들은 낙하산으로 내려와 고액 연봉과 총재 직함을 즐기며 현상에 안주했다.

단언컨대 산은이 골병 든 것은 김대중 정부 때 대북 불법송금의 하수인으로 나서면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근영 당시 총재는 정권의 요구에 따라 현대상선에 4000억 원을 대출했다. 이 돈 중 절반 이상은 달러로 바뀌어 북한으로 건너갔다. 기간산업을 육성하는 국민의 은행에서 정권의 뒷돈이나 대주는 금고로 전락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산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변양균 전 대통령 정책실장과 고교 동창인 김창록 총재가 ‘신정아 스캔들’에 등장하면서 산은의 위상엔 더 흠집이 났다. 사적 친분으로 미술관을 후원한 정황이 분명한데도 그는 밤늦은 시각 자택까지 찾아간 기자들을 따돌리는 데만 신경 썼다. 차라리 ‘친구라서 도와줬다’고 대답했다면 솔직하다는 말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공시족(公試族) 열풍이 불기 전부터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던 산은이 지금 겪는 시련은 역대 총재의 실패가 낳은 결과다.

어제 오전 금융위원회가 금융공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재신임 결과를 발표하자 오후부터 하마평이 쏟아져 나왔다. 관료는 관료대로, 대선 캠프 출신은 그들대로 온갖 연줄을 동원해 한 자리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관료라고 배척받아도, 민간이라고 우대돼도 안 되지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인선이어야 한다. 역대 산은 총재의 실패는 공기업 CEO를 고를 때 훌륭한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 있다. 정권의 코드에 휘둘리는 사람, 공사(公私) 구분이 분명치 않은 사람, 미래를 읽지 못하고 적당히 현상유지로 뭉개려는 사람만 솎아내도 절반은 성공한 인사다. ‘총재’보다 나은 ‘은행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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