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진호]병사에서 장성까지 이렇게 매도해도 됩니까

  • 입력 2006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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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을 맞아 역대 군사령관 및 합동참모본부 의장 모임에 참석했다. 대화는 군 시절의 애환에서부터 최근의 국내외 정세에 집중됐다. 군 원로들이 최근의 안보현실을 우려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러던 차에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한 연설 내용을 신문기사로 보고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합참의장으로 재직했던 필자는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는 ‘주권 없는 나라’라는 인식,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은 잘못이라는 한미동맹관, 헌법이 명시한 국방의무를 ‘군대 가서 썩힌다’고 지적한 대통령 발언의 문제점을 짚어 보려고 한다.

첫째, 국가방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개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대통령은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후 교민과의 대화에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 있으나 결국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전제로 하는 발언이다. 이는 참여정부가 국방백서(2005년)에 명시한 국방목표, 즉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적 통일을 추진한다’는 개념과 정면 배치된다. 우리의 국방목표는 손자병법의 중심사상대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정책을 택한다.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죽을 지경에 이름)이긴 하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승리한다고 했는데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치명적 상처를 입은 후의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북한이 실전 배치를 완료한 스커드, 노동 등의 탄도미사일과 화학무기 그리고 핵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WMD)가 미래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사용되면 6·25전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대량 파괴와 참상이 초래된다.

대통령은 우리 군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시작전권 하나 없는 군대’라고 지적했지만 전시작전권은 미국의 임의대로 행사할 수 없다. 한미 양국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전략지시와 작전지침을 받아야 한다. 국군통수권자의 통제를 받지 않는 권한으로 보는 것은 중대한 사실의 왜곡이다. 더욱이 수도권을 포함하여 한강 이남은 한국의 합참의장이 전시작전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하는 전시작전권은 전쟁 승리를 위해 증파되는 미 증원군의 통솔과 한국군과의 능률적인 연합작전을 위한 한미 간 전시작전권의 역할분담이지 결코 ‘주권’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남북한 군사력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군 단독 전력을 북한군과 비교했을 때에는 상대적 열세이고 한미 연합전력을 포함했을 때에는 북한과 대등하거나 우세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도 북한의 핵 보유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평가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순간 군사력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북한은 핵과 화생방무기, 장거리미사일 개발 시 어떤 국제적 협약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공격 위주의 전력을 증강했다. 한국은 한미 간 ‘미사일 협정’과 같은 쌍무적 제약장치뿐만 아니라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화학무기금지협약(CWC) 등 국제규약을 준수하면서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했다. 공격작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WMD 분야에서 한국은 북한에 비해 극히 열세하다.

셋째, 한미동맹에 대한 평가를 보자. 동맹은 자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국가와 잠재적 또는 현재적 위협이 되는 타국에 공동 대응하는 제휴관계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현실에서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혹은 ‘엉덩이 뒤에 숨어서’로 비하한다면 미국과 동맹을 맺은 수많은 국가, 특히 우리보다 국력이 우월한 국가는 자존심이 부족하고 주권에 대한 자각이 없어서라는 말인가.

올해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우리는 미국에 핵우산 제공을 더 확실하게 명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시작전권을 위임하는 것은 굴욕이고, 핵우산 제공을 요청하는 것은 자주인가. 국가의 위기, 특히 국민의 안위가 걸린 전쟁과 같은 절박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핵우산 속이 되었건, 엉덩이 뒤에 숨건, 아니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서라도 국가와 국민을 구하겠다는 지도자가 진정 존경받는 국가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넷째, 군대 가서 몇 년씩 썩힌다는 군 복무관도 문제다. 국민개병제도를 택한 우리나라의 군 복무자들은 6·25전쟁 당시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했고 베트남과 이라크에 파병돼 국위를 선양했다. 군은 국민교육의 장으로서 문맹을 퇴치하고 각 분야의 기능 인력도 배출했다. 군에서 국가의 소중함과 국민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정신을 길러 왔음을 많은 학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대한민국 남자는 군에서 총 쏘고, 무장구보하고, 벌 받은 군 생활의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헌법에 명시된 자랑스러운 국방의무를 수행한 이 나라의 모든 남성이 갑자기 뺑뺑이 돌리는 군에서 썩다 나온 사람으로 비하됐다. 왜, 무엇 때문에, 병사에서 고위 장성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헌신한 사람과 군이 싸잡아 매도되고 폄훼돼야 하나. 그것도 가장 격려해 줘야 할 국군통수권자로부터 말이다. 안타깝다.

김진호 예비역 육군대장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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