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용옥]6·15에 가려진 6·25

  • 입력 2006년 6월 1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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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러나 호국보훈의 달에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을 추념하는 현충 행사나 6·25전쟁을 상기하는 행사보다는 6·15남북공동선언을 자축하는 소리가 더 크다.

올해 들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지하의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이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부끄러운 과거 역사’ 강의를 들어야 했고, 10일 평양에서의 한 보고회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온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는 대남 협박 발언을 한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은 14∼17일 광주에서 열린 6·15선언 6주년 기념행사에 북측 민간대표단장 자격으로 참석하면서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참으로 호국보훈의 달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다.

지금은 6·15선언의 분위기에 들떠 6·25의 교훈을 잊어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때인 것 같다. 호국보훈의 의미나 쓰라린 역사적 교훈을 망각할 때는 과거의 전철을 다시 밟게 마련이다.

우선, 현 북한 정권의 대남정책은 남한을 포함하는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 건설”이 최종 목표임을 노동당 규약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정권과 ‘연합’이든 ‘낮은 단계의 연방’이든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지금은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가 임박한, 안보적으로 매우 엄중한 상황 아닌가.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정치, 군사, 국제관계 등 몇 가지 측면에서 6·25 이전을 떠올리게 한다.

첫째,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1948년 4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백범 김구 선생의 북한 방문이나 이달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통일문제를 “흉금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겠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계획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의 방북이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과 함께 김정일은 그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군사적인 면에서 북한은 6·25 남침 도발을 위해 이미 소련의 지원으로 압도적인 대남 군사 우위와 대규모 기습 공격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북한은 지난해 2월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다. 즉, 한반도는 지금 북한의 핵무기 보유로 ‘핵무기 지대’로 변한 것이다. 물론 지금 북한의 국력이나 전쟁 수행 능력이 6·25 당시처럼 우리를 앞선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핵무기, 생화학무기. 미사일 등으로 무장한 군사력과 재래식 군사력은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셋째, 국제관계 측면이다. 1949년 6월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은 고문관 500여 명을 남겨 놓고 모두 철수했다. 최근 한미 간에는 한미연합군사태세의 강화 문제보다는 기지 이전 및 반환, 훈련장 제공, 작전통제권 등의 문제를 놓고 상호 갈등과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56년 전 북한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떠난 다음 해에 바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과 남한 내 남로당 세력을 이용하여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6·25 무력 남침을 감행했다. 정치적 평화공세에 이은 군사 도발이었다.

그때와는 제반 여건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상황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세기 전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면 우선 우리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안으로는 스스로 힘을 기르며 밖으로는 한미동맹 등 우방과의 동맹관계를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박용옥 한림국제대학원대 부총장·전 국방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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