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승헌]‘중대형 채권입찰제’ 누구를 위한 건가

  • 입력 2005년 12월 30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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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청약할 때부터 2억 원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의 중대형 아파트 청약을 기다려 왔다는 최모(42·서울 강동구 암사동) 씨는 29일 기자에게 전화해 이렇게 항의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년 8월까지 2억 원을 마련하기는 힘들 것 같아 다른 아파트를 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정부가 판교신도시 중대형 아파트에 적용할 채권입찰제 시행 방안을 발표하자 “말로는 중산층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일부 부자를 위한 제도”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문 선(先)분양제도는 서민이나 중산층이 조금씩 돈을 마련해 내 집 마련을 하도록 돕자는 취지다. 하지만 판교신도시에 25.7평 초과 아파트를 청약하려면 계약 초기 수억 원의 돈이 필요해 보통 사람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

건설교통부 추산에 따르면 판교의 45평형 아파트를 계약하려면 계약금 외에 3억 원이 넘는 채권을 사야 한다. 채권을 곧바로 할인해 판다고 해도 최소한 1억9000만 원은 쥐고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건교부의 한 간부는 “돈 없는 사람은 소형 아파트에 청약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중산층이 중대형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심리는 어떻게 해소해 줄까.

정부는 분양가와 채권부담액을 합해 주변 시세의 90%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변 시세라는 개념이 애매한 데다 인근 성남시 분당신도시의 집값이 다시 들썩이고 있어 실제 청약자가 마련해야 할 현금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개발이익을 환수해 서민용 임대주택을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중산층을 위해 분양가를 낮춰 주변 집값을 잡겠다는 당초 취지는 오간 데 없다.

제도가 너무 복잡하다는 항의도 잇따르고 있다. 주변 시세는 계속 달라지기 때문에 채권상한액은 청약 1주일 전에나 발표될 것이다. 입찰에 필요한 현금이 예상보다 늘어난다면 웬만한 사람이 이 돈을 1주일 안에 마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양가 자율화 조치로 2000년 이후 사라졌다 부활한 채권입찰제는 ‘부동산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건설업체나 당첨자가 지나친 시세 차익을 얻지 않도록 하면서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내년 8월 시행 전에 더 면밀하게 제도를 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승헌 경제부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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