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QWERTY 경제학

입력 2005-12-16 03:02수정 2009-10-0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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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키보드의 영문 자판은 왼쪽부터 QWERTY의 순서로 배열된다.

1870년대 타자기용으로 개발된 이 자판은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하기보다 당시 기계적으로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타자기가 널리 보급되자 비능률적인 자판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편리하고 타자 속도도 빠른 다른 자판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기존 자판에 익숙한 타이피스트들이 많아 다른 자판이 발붙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QWERTY 자판의 사례는 ‘경로 의존 현상’이라는 경제이론이 되었다. 즉, 시장원리에 따라 가장 훌륭한 제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우연한 사실’에 따라 어떤 제품이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으로도 활용된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우연’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산업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뭐 대단한 이론 같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960, 70년대 정부 주도로 산업을 일으킨 한국은 QWERTY 경제학을 알기 전에 이미 이를 실천했다.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다는 울산과 창원 공단이 이렇게 만들어졌고 지금 한국을 먹여 살리는 철강 자동차 조선 산업이 이렇게 키워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방식의 경제개발이 어렵다.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의 협약에 따라 정부가 개별 산업을 직접 육성하거나 지원하지 못한다. 정부가 자원을 집중 투입해 특정 산업을 지원한다는 계획은 우선 국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이다.

그 대신 정부는 기초연구개발을 지원하고 국내외 기업과 대학, 연구소들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을 마련함으로써 ‘경로 의존적 발전’을 이끌 수 있다. 중국의 중관춘(中關村)이나 스웨덴의 시스타 같은 산업클러스터가 정부의 직간접 지원으로 조성됐다.

한국도 경제자유구역이나 기업도시를 만들어 혁신과 발전의 핵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03년 시작된 인천, 부산-진해, 광양 등 경제자유구역은 아직도 이렇다 할 외국 기업이나 병원, 대학을 유치하지 못하고 황량하기만 하다. 기업도시는 기업 없는 도시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싱가포르가 2003년 바이오폴리스 건설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GSK 노바티스 존스홉킨스 등 세계적인 기업 및 대학 연구소들을 유치한 것과 대조적이다.

과감한 유인책을 써서 돈과 인재를 끌어 들여야 할 텐데 정부는 이런저런 힘에 떼밀려 ‘안 되는 걸 어쩌나’ 식이다. 전국적으로 공공기관 이전 등 신도시를 너무 많이 추진해 자원이 분산되는 것도 문제다.

해마다 자금융자와 기술지원 등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중소기업 지원은 ‘나눠 주기’가 많아 기업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 정부는 다양한 경제 정책을 내놓았지만 각각이 경쟁력 강화정책인지 복지정책인지, 국토균형정책인지 국가발전전략인지 목표마저 헷갈린다. 이러니 말만 무성하고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구심점이 되어 21세기 형 ‘QWERTY 자판’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 세대를 먹여 살릴 성장 동력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신연수 경제부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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