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69>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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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군사의 움직임을 빨리 하고 도성 임치로 가는 길은 끊는다고 끊었지만, 역하의 싸움에서 대여섯 날을 더 쓰고 나니, 제왕(齊王) 전광의 귀에도 한신의 대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날도 역이기와 늦도록 술잔을 나눠 아직 얼얼한 머리로 늦은 아침상을 받고 있던 전광은 한신이 평원성에 이어 역성까지 떨어뜨렸다는 소문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들고 있던 수저를 내던지며 객관에 머물고 있는 역이기를 끌고 오게 했다.

“늙은 것이 잘도 과인을 속였구나. 죽을 각오는 되었느냐?”

전광이 그렇게 소리치자 역이기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길로 전광을 올려보며 물었다.

“왕께서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내가 무얼 속였다는 것입니까?”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하수를 건넜다. 평원성을 급습해 떨어뜨린 뒤 다시 역하로 쳐들어와 전해와 화무상의 군사를 쳐부수고 역성까지 차지했다고 한다. 역하에 있던 우리 군사 20만은 제나라의 주력이고, 전해와 화무상도 산동이 알아주는 맹장들이었다. 그런데도 한신에게 그렇게 어이없이 지고 만 것은 바로 네놈 때문이다. 유방이 화평을 바란다는 네놈의 말만 믿고 방심하였다가 갑자기 등 뒤를 찔린 셈이니, 이래도 네놈이 과인을 속이지 않았느냐?”

그제야 역이기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너무 뜻밖이라 잠시 눈앞이 아뜩하였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곰곰 앞뒤를 헤아려 보았다. 냉정하게 살피니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 듯도 했고, 그걸 미리 헤아리지 못한 것이 섬뜩한 후회로 다가들기도 했다.

“변사(辯士)가 남을 달래기 위해 못할 말이 없지만, 제 목숨까지 내던져 남을 속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만약 내가 왕을 속이려 왔다면, 뜻을 이룬 그날로 제나라를 빠져나가 멀리 달아났을 것이오. 무엇 때문에 여기 이렇게 남아 내 몸을 인질로 내주고 있었겠소?”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렇게 받았으나 가슴속은 머지않아 다가올 참혹한 고통과 죽음의 예감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역이기의 그와 같은 대답에 제왕이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이를 갈듯하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하수(河水)와 제수(濟水)를 건너 천리를 쳐들어온 한신의 대군은 어찌된 것이냐? 태산이나 동해로 놀이라도 나온 것이라더냐? 좋다. 네가 정히 나를 속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한나라 군대를 멈추게 하여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과인은 너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겠다.”

그 말을 듣자 역이기는 자신에게 다가드는 죽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감지했다. 그래도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게 일순 반가웠으나, 이내 변사로서의 냉철한 인식이 그럴 수 없음을 일깨워 주었다.

“나라가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위로 하늘에 이르는 자도 아래로 못(淵)에 이르는 자도 함부로 멈출 수 없는 큰일이다. 한나라 군사가 제나라로 쳐들어 온 것이 우리 대왕의 뜻이 바뀌어서인지 한신이 멋대로 움직인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한낱 늙은 세객(說客)이 멈출 수 있는 일이 못된다.”

역이기가 아뜩하게 무너져 내리는 몸과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면서 오히려 가슴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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