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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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와 같은 역이기의 대답에 듣고 있던 제왕(齊王) 전광(田廣)의 얼굴이 한층 무섭게 일그러졌다. 불길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역이기를 내려다보며 목청을 높였다.

“그것 보아라. 결국 네 놈이 과인을 속인 게 아니고 무엇이냐? 너는 한왕 유방과 짜고 화평을 내세워 과인과 제나라 군사들을 방심하게 만든 뒤에 갑자기 한신의 대군을 끌어들였다. 그래놓고도 구구하게 발뺌을 하려 드느냐?”

역이기가 그런 제왕을 한 번 더 충동질해 죽음을 재촉했다. 한바탕 껄껄 웃어 스스로 삶에 대한 미련을 털어 버리고는 아이 달래듯 제왕에게 말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나무람이나 비웃음을 귀에 담지 않는다. 네가 이미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면 내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겠구나. 내 너를 위해 다시 무엇을 말하겠느냐?”

그러자 제왕도 더는 참지 못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 늙은 개를 삶아 죽여라!”

그러자 시위들이 세 발 달린 큰 솥을 궁궐 뜰 안으로 옮겨 와 솥 안에 물을 가득 채우고 역이기를 집어넣었다. 솥 아래 장작불을 지핀 지 한 식경이 되자 솥 안의 물이 뜨겁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한 식경 역이기는 끓는 물에 삶긴 채 죽었으나, 끝내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역이기를 삶아 죽인 제왕과 재상 전횡(田橫)은 그래도 다 풀지 못한 분노를 억누르며 한신과 맞설 의논을 했다. 싸움에 익숙한 전횡이 급한 대로 계책을 내놓았다.

“임치는 오래된 땅이라 사는 사람은 많아도 기대어 싸우기에는 좋은 성이 못됩니다. 성벽이 낡고 헐었을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전선이 길어 적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 이내 토막 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임치는 도성이라 함부로 적에게 내줄 수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재상으로 세운 뒤에 한 갈래 군사를 주어 죽기로 지키게 하십시오.”

전횡은 그렇게 말하고 족제인 전광(田光)을 재상에 가임(假任)한 후 5천 군사와 더불어 임치를 지키도록 하라고 권했다. 제왕이 그 말을 받아들이자 전횡이 다시 이었다.

“대왕께서는 동쪽 고밀(高密)로 물러나 계십시오. 고밀성은 동쪽에 치우쳐 있지만 성벽이 높고 두꺼워 많지 않은 군사로도 버텨내기 좋은 곳입니다. 또 장군 전기(田旣)는 1만 군사로 교동(膠東)에 진을 치게 하고, 신은 남은 전군을 들어 영(영) 땅과 박(博) 땅 사이에서 한신의 대군을 맞아 보겠습니다.”

“만약 한신이 과인을 노리고 먼저 고밀로 대군을 몰아오면 어찌하겠소?”

제왕이 문득 걱정되는 듯 물었다. 전횡이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받았다.

“화무상의 대군이 깨져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로는 한군을 이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고약하지만 초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패왕은 유방이 미워 반드시 원군을 보낼 것이니 그들을 고밀로 불러들이면, 설령 한신이 조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그리고 내몬다 해도 대왕께서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기 살기로 맞서 싸우던 패왕 항우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천하의 맹장 전횡에게 결코 기꺼울 수는 없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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