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68>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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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산동(山東)의 억양을 쓰기는 하지만 낯선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와 다시 성문을 닫아걸려는 제나라 군사들을 베어 넘겼다. 임치로 달아났다가 되돌아왔다고 우기던 화무상의 장졸들도 태도가 돌변했다. 그 수상쩍은 원병(援兵)들을 도와 성문을 열고 한군(漢軍)이 뒤따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모두 성벽을 내려가 성문을 지켜라. 저것들을 내쫓고 성문을 닫아걸어라!”

놀란 전해가 그렇게 소리쳤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역성을 지키던 군민들이 동쪽 문루 부근의 성벽을 모두 비우다시피 하며 달려 내려갔으나 동문을 되찾고 닫아걸기는 틀린 일로 보였다. 그 사이 뛰어든 적이 벌써 천 명이 넘어, 넓지 않은 동문 안 공터에서 수천 명이 우글거리며 밀고 밀리는 피투성이 혼전이 되고 말았다.

전해가 발을 구르며 그곳 싸움을 독려하고 있는데, 다시 남문에서 급한 기별이 왔다. 조참이 거느린 한나라 군사 부대가 남쪽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해가 되는 대로 군사를 갈라 남문 쪽으로 보내려는데 이번에는 북문 쪽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적의 두 갈래 군사가 힘을 합쳐 북문을 깨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성문이 깨어질 듯하니 어서 군사를 보내 주십시오.”

그 말에 전해는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이제는 더 보낼 군사도 없는데, 북문이 깨진다면 성을 지키기는 벌써 글러버린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크게 함성이 일며 전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성벽 위로 한신의 본대가 한꺼번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해가 망연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마련한 것인지 한군의 구름사다리가 오뉴월의 무성한 호박 넝쿨처럼 성벽을 뒤덮고 있었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로구나….’

전해가 꼭 남의 말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을 빼 들었다. 전해가 성벽 가득 기어오른 한군에 둘러싸여 마지막 한칼을 휘두른 뒤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해가 죽고 세 성문이 열리자 역성 안에서는 한군에 맞서는 군사가 더는 없었다. 한신이 항복하는 군민은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니, 날이 밝기 전에 역성은 품에 안기듯 한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역하(歷下)의 싸움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이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역하의 싸움은 한신에게 결코 정형(井형)의 싸움보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역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제나라의 주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20만 대군이었다. 거기다가 역성은 북으로 제수(濟水)를 두르고도 또한 높고 든든한 성벽을 자랑하는 군사적 요충이었다.

그 역성에 기대 지키는 20만의 제나라 대군을 3만도 안 되는 군사로 쳐부순다는 것은 아무리 병법에 뛰어난 한신이라도 적잖이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엄정하기로 이름난 ‘사기’는 어찌된 셈인지 이 부분에서 그저 이겼다는 말뿐 기록이 소략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제나라 정벌 뒤에 있었던 한왕 유방과의 불화와 그 때문에 끝내 목숨까지 잃게 된 모반의 혐의가 태사공(太史公)의 붓대마저 무디게 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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