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호섭]고이즈미, 극우에 기댈 이유 없어졌다

  • 입력 2005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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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실시된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번 여름 내내 정국 주도권을 쥐고 개혁을 국민에게 호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우정(郵政)사업 민영화가 실패하면 다른 어떤 개혁도 할 수 없다”며 개혁을 앞세운 고이즈미 총리 덕에 ‘낡은 일본’에 대해 정작 책임져야 할 자민당이 개혁 주체가 되었으며, 낡은 정치 체제를 비판해 온 야당 민주당이 수구 세력이 되어 버렸다. 개혁의 깃발을 고이즈미 총리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자민당은 480석 가운데 296석을 얻었다. 종전보다 84석이나 늘어난 것이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의석(31석)까지 합하면 개헌안의 국회 의결선인 재적 3분의 2(320석)를 넘는 327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선거 전 177석에서 약 3분의 1을 상실하고 113석에 불과한 견제 세력이 되었다. 국회의 이러한 압도적인 세력 분포 때문에 자민당이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일본 정치가 급격히 우경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국가주의적 행보를 보이던 고이즈미 내각이 독도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 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필자는 이번 선거 결과가 일본 정치의 보수화 과정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이번 선거 결과로 특별히 우경화가 촉진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이번 선거의 최대 쟁점은 우정사업 민영화 정책이었으며, 이를 추진하려는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의 성격이었다. 우정사업 민영화는 관료 주도의 경제 체제에서 민간 주도의 체제로 이행하겠다는 자유주의적 개혁이다. 좌파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이 경험한 우경화는 국가가 주도하며 군사력을 배경으로 국익을 대외적으로 확대 팽창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보면 우정사업 민영화는 ‘일본식 우경화’와는 반대의 성격이 있는 정책이다. 일본 유권자들은 시장 주도의 개혁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선거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둘째, 자민당은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도쿄의 25개 선거구에서 23석을 확보하였다. 농촌 지역은 자민당을 지지하고, 도시 지역은 야당을 지지한다는 일본식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을 고이즈미는 완전히 극복했다. 지지 기반을 광범위하게 확보했기 때문에, 자민당은 우익 세력의 정치적 지지를 특별히 동원할 필요가 없게 됐다. 따지고 보면 자민당 의원들이 역사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극우적 견해를 밝히기 시작한 것은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자민당이 지지받지 못하던 시기부터다. 자민당에 대한 국내 정치적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역사 문제가 외교 쟁점으로 나타난 것이다.

셋째, 야당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나 평화헌법 개정에 관한 견해를 선거 쟁점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일본 유권자들은 헌법 개정이나 역사 문제를 정치적 현안으로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또한 자민당은 외교 부문에서의 성과가 선거 쟁점이 되는 것을 극력 회피했다. 고이즈미식 아시아 외교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간절히 소망한 일본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한 아시아 국가는 3개국에 불과했으며, 중국 한국 같은 주요 이웃 국가는 반대했다. 이웃 국가의 지지도 못 받으면서 세계 정치의 중심 국가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일본 외교 당국과 자민당은 우익의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포석이 외교적 실패를 가져왔다는 점을 반성할 것이다.

상당 기간 독도 문제 등이 한일 양국 간 현안에서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분석이 옳다면 이번 선거 결과 때문에 특히 악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거꾸로 이번 선거 결과를 계기로 고이즈미 총리가 이웃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여유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김호섭 중앙대교수·국제관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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