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동남아국가연합 발족

  • 입력 2005년 8월 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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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에서 방금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입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1960, 70년대 코미디언 겸 MC로 안방극장을 누볐던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1999년 작고) 씨가 출연가수를 소개할 때 썼던 단골 표현.

동남아 순회공연이라고 해봐야 베트남전쟁에 참전 중인 한국 장병 위문 공연이 대부분이었지만 ‘먼 해외=동남아’로 인식됐던 당시 연예인으로서 동남아 공연은 인기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이역만리의 땅으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의 정치적 경제적 무게에 주목하게 된 날은 1967년 8월 8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 5개국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발족시켰기 때문.

같은 달 10일자 동아일보 사설.

“이 5개국은 고무 주석 목재 쌀 같은 원시산품의 세계적 공급국이어서 수출상품의 가격과 공급량 조절을 통해 선진국에 대한 압력그룹의 구실을 하는 데 충분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ASEAN의 시작은 미약한 것이었다. 국제기구 설립의 기초인 정식 조약도 없었고 공산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은 “반동(반공)세력의 결집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했다.

ASEAN 발족의 주역 중 한 명인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조차 “경제 성장이나 무역 증대 같은 거창한 목표보다 역내 권력 공백에 대비한 결속이 진짜 목표였다”고 회고할 정도. 당시 베트남전이 한창이었고 동남아 내 사회주의 기세가 등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ASEAN은 끝이 창대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브루나이(1984년) 베트남(1995년) 라오스 미얀마(이상 1997년) 캄보디아(1999년)가 추가로 가입해 회원국이 10개국으로 늘었다. ‘ASEAN+3(한중일)’처럼 주변국과의 정례 회의도 활발하고 선진국들의 ASEAN 시장을 향한 구애도 뜨겁다.

인종 및 종교 간 갈등과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ASEAN 10개국을 결속시켜 온 힘은 무엇일까. 주권 존중과 평등 의식을 바탕으로 전원 의견 일치가 될 때까지 대화를 계속하는 독특한 관행의 위력이란 분석이 많다. 연례정상회의 개최 장소 문제를 둘러싸고 일부 회원국 간에 갈등이 일자 이견이 해소될 때까지 그 회의를 9년간 열지 않고 기다린 적이 있을 정도.

해외공연 지역의 대명사로만 여겨지던 ASEAN이 이처럼 뭉치며 강해지고 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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