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내가 입을 열면…”

  • 입력 2005년 7월 26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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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0년 4월. 당시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 정치적 충돌이 잦았던 박철언 정무 제1장관이 기자들에게 말했다. “3당 통합 과정이나 소련방문 중에 있었던 비화(秘話)를 얘기하면 YS의 정치생명은 하루아침에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계파 갈등이 심했던 민자당의 내분은 격화됐고, 정치판은 YS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비밀에 대한 온갖 추측이 만발했다.

▷“내가 입을 열면….” 대형 정치적 사건이나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면 수세(守勢)에 몰린 측에서 심심치 않게 하던 말이다. 장세동, 이원조, 정태수, 장영자, 권노갑 씨 등이 비슷한 말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도 있었다. 김영배 전 의원은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이 끝난 뒤,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는 그 후 대선자금 비리와 관련해 “내가 입을 열면…”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빙산(氷山)의 일각에 불과하고 거대한 진실은 따로 있다는, 억울함의 호소이자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런 정치판의 ‘학습효과’일까. 엊그제는 YS 정권 시절 주요 인사에 대한 불법 도청을 자행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 팀장이었던 공모 씨가 “내가 입을 열면 안 다칠 언론사가 없다”고 말했다. 퇴직 후에도 직무상 얻은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되는 전직 정보기관 요원이, 그것도 불법 도청한 내용을 무기로 세상에 대고 큰소리를 치는 격이다. 정보기관을 악용했던 못된 권력이 낳은 ‘못된 버르장머리’가 아닌가.

▷‘비밀은 간직하고 있는 동안은 당신의 수인(囚人)이지만 털어놓으면 당신이 비밀의 수인이 된다’는 유대 속담이 있다. 그래서일까. “내가 입을 열면…”치고 뒤에 입을 연 경우는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말이 아예 발붙일 수 없도록 정치 경제 사회 구석구석의 투명성과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불쾌하고 음습한 표현을 다시 듣지 않는 분명한 길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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