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재경]신문의 오늘, 신문의 내일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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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신문협회(WAN) 서울총회를 축하한다. 여러 가지 위기론이 신문 현실을 덮고 있는 시점에 열리는 신문인들의 모임이라서 이번 총회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980년대 초 테드 터너가 CNN을 세우며 ‘신문 소멸론’을 제기한 뒤 신문의 위기의식은 오늘까지 지속돼 왔다. 원인은 말할 나위 없이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 경쟁 매체들의 폭발적인 증가다. 개인이 대중매체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비용이 어느 정도 일정하다는 매체비용의 상대적 불변이론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문의 영향력은 내리막길을 면하기 어렵다.

지난 20여 년은 신문에 이러한 기술적 숙명과의 대결 과정이었다. 한편으로 줄어드는 독자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디지털 세상에서 낡은 미디어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혁신의 실험들을 진행해야 했다. 다행스러운 일은 더 이상 ‘1980년대식 소멸론’을 믿는 학자가 없다는 점이다. 상대적 영향력은 줄어 왔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를 신문만큼 대량으로 또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방송인인 월터 크롱카이트 씨다.

그는 자서전에서 “네트워크 TV의 저녁뉴스는 뉴욕타임스 신문의 1면에 실린 정보량의 절반 정도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신문을 읽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민주사회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기능하려면 신문 읽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여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면 신문은 당분간은 별문제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신문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적인 추세를 보면 뉴욕타임스나 LA타임스 등 최고급 신문은 어려움은 있을지라도 존망의 위기를 걱정하는 상황은 아님이 분명하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기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건상 최고급 기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많은 신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최고급 수준을 지향하는 신문을 찾기가 어렵다. 취재진의 규모나 기사를 판단하는 기준 등이 세계 최고 수준과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WAN 총회 개막연설에서 “언론사가 민주적 지배구조를 발전시켜야 하고 정파성을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도 당연한 충고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는 좋은 신문의 조건을 채울 수 없다.

시급한 과제는 정부에 대한 감시능력을 대폭 강화하는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현재 진행되는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사건과 행담도 관련 보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상당 기간 온 나라를 흔들고 있지만 이들은 신문이 파헤쳐서 쟁점이 된 사안이 아니다. 정부기관인 감사원과 검찰이 주도하며 흘려주는 정보를 받아쓰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 핵 문제나 6자회담에 관해서도 신문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정부를 견제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의 인력구조와 지면 수를 고려하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주문이다.

여기에 지방신문지원법 발효로 정부 예산에 신문 운영을 기대기 시작하면 정부에 대한 감시기능은 원천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신문은 없고 홍보만 남는’ 시대는 우리가 원하는 민주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미국 언론인들은 좋은 신문의 조건으로 기사당 적어도 4개의 취재원과 상충하는 관점의 포함 등을 당연시한다. 기자의 의견을 철저히 배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 기사들 가운데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는 사례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번 세계신문협회 총회가 한국 신문 발전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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