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수형]어느 ‘中道低派’ 판사 이야기

  • 입력 2005년 3월 16일 18시 51분


소년이 마루에서 놀고 있을 때 거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거지 왔어요.”

어머니는 쌀 한 움큼을 가지고 나오면서 나지막하게 소년에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손님 오셨다고 해라.”

그로부터 20여 년. 소년은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검찰청에서 검사 시보로 일하게 되었다. 첫 배당 사건은 자전거 도둑. 학교 대신 공장에 다니던 14세 소년이 피의자로 불려왔다. 시보는 피의자의 딱한 사연을 말하며 지도검사에게 기소유예로 석방하자고 했다. 그러나 “실무상 자전거 도둑은 모두 구속 사안”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시보는 소년을 기소한 뒤 주머니에 있던 껌을 꺼내 수갑을 찬 소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후 시보는 판사가 되었다. K 판사. 1974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30년 넘게 판사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사소한 것을 다룬다 하더라도 재판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고향의 법원 원장으로 부임해 매일 아침 직원들과 e메일 통신을 했다. “어떤 주제라도 좋으니 함께 대화를 하고 지혜를 모으자”면서. 이렇게 해서 ‘지산통신’이 시작됐다. ‘지산(芝山)’은 법원이 있는 동네의 이름.

법원장은 지난달 법관 인사 때 지산을 떠나 대법원으로 왔다. 직원들은 지난 1년간의 e메일을 모아 책으로 엮어 선물했다. 책 모습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내용은 무척 따뜻하다.

서울지법 출입기자 시절 K 판사를 직접 본 적이 있다. 그는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법정에서 판결문을 읽을 때면 늘 “형량을 징역 O년으로 정합니다”라고 경어를 썼다. 나중에 그의 판결문을 찾아보면 여느 판결처럼 “징역 O년에 처한다”고 돼 있었다.

며칠 전 어느 판사 방에 들러 우연히 지산통신을 보고 그 의문이 풀렸다. K 판사는 법 규정에 충실하기 위해 판결문에는 ‘…처한다’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피고인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인데 그를 앞에 두고 차마 ‘…처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는 ‘중도(中道)’를 좋아한다고 했다. 누가 ‘중도우파냐’ ‘중도좌파냐’고 물으면 그는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동문서답(東問西答)한다고 했다. 굳이 편을 들라면 낮고(低)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겠다는 뜻이다.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존중이다. 정의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지산통신에는 그 인간 존중의 이야기가 수십 편 이어져 있다. 법원 직원들은 매일 아침 법원장의 e메일을 보며 ‘정성껏 빚은 차 한 잔을 마시는 기분이었다’고 적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조금밖에 안 만들어져 일반인이 읽을 수 없다는 점. 뜻있는 출판사가 나서서 다시 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드러내길 싫어하는 K 판사는 반대할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양보를 하셔도 좋을 것 같다. ‘따뜻한 마음’은 전염될수록 좋은 것이니까….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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