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병기]경제주체 불신의 늪

  • 입력 2005년 3월 7일 18시 03분


코멘트
국회 재경위는 지난달 말 한국투자공사(KIC)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날로 늘어나는 외환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해외 투자를 목적으로 출범하는 조직이다.

문제는 국회가 법안을 일부 바꿔 KIC의 수익률, 투자대상, 편입종목 등 투자내용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 부동산, 파생금융상품, 사모펀드는 투자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해 금융전문가들은 “투자의 기초도 모르는 결정”이라고 혹평한다. 투자 내용을 공개하라는 것은 핵심 노하우를 해외의 경쟁기관에 알리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KIC와 비슷한 기관인 싱가포르투자청은 투자 내용을 절대 공개하지 않으며 부동산과 파생상품 분야에도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린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이 낳은 부작용이다.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마땅히 비밀로 해야 할 사안을 불신 때문에 공개한다.

KIC뿐이 아니다. 경제주체 간 불신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지불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는 저서에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없는 국가는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고 설파했다.

재계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또 어떤가. 지난달 국민연금관리공단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기준’을 발표하자 재계는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정부의 재계에 대한 불신은 더 심하다. ‘국내자본 역차별론’이 나올 정도로 정부가 재벌을 규제하는 배경에는 경제 관료의 재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

외환위기 직후 부실자산을 매각하면서 한동안 외국자본만 입찰에 참가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자본에 자산을 넘기면 반드시 특혜 의혹이 나온다”는 비공식 해명이 있었다. 그 덕분에 해외자본은 헐값으로 한국의 자산을 사들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불신은 과거 관치(官治)경제, 재벌의 폐해, 정경유착 등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불신 때문에 생겨난 상호 견제장치 때문에 지불하는 비용이 너무 크다.

신뢰는 사회적 자산이라는 사실을 모든 경제주체가 깨닫는 날은 언제 올까.

이병기 경제부 ey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