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경제 업그레이드]<3>주5일제 여가 ‘펀(fun)경영’

  • 입력 2005년 1월 3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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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가족 여행을 자주 가다 보니 감당하지 못할 만큼 지출이 늘었다.” “주말에 뭐할까 고민하거나 아이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한 시중은행 직원들에게 주5일(40시간) 근무제 시행 이후 달라진 점을 물었더니 이런 하소연들이 쏟아졌다. 최근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는 취지에서 직원들의 여가와 문화 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이른바 ‘펀(fun) 경영’을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주5일 근무제는 직장의 펀 경영을 가정에 접목해 주는 연결통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직장인들은 ‘주5일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명지대 대학원 여가정보학과 김정운(金珽運) 교수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여가는 재앙이 될 수 있다”며 “여가의 내용과 비용을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가 활동은 돈 먹는 하마(?)=A 은행 김모 차장의 새해 결심 목록에는 ‘여가비용 절반 이하로 줄이기’가 포함돼 있다.

주5일 근무제 이후 매주 한 차례 가족과 주말 나들이를 ‘의무적’으로 가다보니 월 여가비용이 50만 원이나 돼 이처럼 늘어난 지출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본보가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 주부 고객 10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42%(44명)가 가족의 여가 및 건강관리 비용으로 월 소득의 10% 이상을 지출한다고 응답했다. 월 소득의 5∼10%를 쓴다는 응답은 33.3%였다.

푸르덴셜생명 오종윤(吳宗倫) 라이프플래너는 “적정 여가비용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처분소득의 5%를 넘으면 과도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P 씨는 “매주 어디 갈지 정하는 일이 스트레스이고 교통체증으로 인해 안 떠나느니만 못한 여행이 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아이가 좋아하는 눈치고 또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여가비용을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뭔가 ‘확실하게’ 놀지 않으면 주말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도 효과에 비해 여가비용을 과다 지출하는 요인이 된다.

▽노는 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명지대 여가문화센터가 주5일제 근무를 하는 직장인 770명을 대상으로 ‘여가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요인’을 조사한 결과 29.4%가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등 ‘여가 콘텐츠 부족’을 꼽았다.

실제로 한국인은 TV 보는 것을 제외하면 여가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다. 한국인의 1주일 평균 여가시간은 1981년 19시간 15분에서 1999년 24시간 6분으로 늘었다. 그러나 TV 보는 시간을 빼면 4시간 26분에서 3시간 18분으로 줄었다.

휴먼경영연구원 이장주(李長周) 연구위원은 “만들어져 있는 여행상품이나 레저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성 여가’를 제외하면 한국인은 즐겁게 시간 보내는 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진짜 펀 경영은 가족 모두가 재미를 느껴야=미국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로버트 라이시 노동부 장관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연 장관직을 그만뒀다.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가정으로 돌아간 그는 또 다른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녀와의 대화는 어색하기 일쑤였고, 아내는 종종 자신을 귀찮아하더라는 것.

휴먼경영연구원 이 연구위원은 “가족 구성원 간 공감대가 약한 상태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가족 사이에서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명지대 김 교수는 “목돈 마련을 위해 오랫동안 적금을 붓듯 미리 시간을 조금씩 ‘투자’해야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운동이든 요리든 가족 구성원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나씩 개발해야 한다는 것. 또 그 활동이 가족에게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지표는 펀 경영의 핵심인 ‘재미’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이홍근씨 가정 ‘펀’비결…“가족음악회로 한주일 피로 싹∼”▼

롯데호텔 이홍근 재경팀장(왼쪽에서 두 번째) 가족의 작은 음악회. 이 팀장은 “펀 경영으로 모두 마음이 즐거워지니 병도 안 생기는 것 같다”며 “최근 수년 간 의료비 지출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롯데호텔 이홍근(李弘根·49) 재경팀장 가족은 주말 저녁이면 집에서 ‘작은 음악회’를 연다.

이 팀장은 기타, 부인 이점순 씨(45)는 피아노, 딸 현선 씨(22)와 아들 현섭 군(16)은 플루트를 연주한다.

이 팀장 가족은 3년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모여 각자의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현섭 군은 “음악적으로 잘 맞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연주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 가족의 또 다른 소통 통로는 편지. 이 팀장은 “부부싸움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고 나면 금세 마음이 풀린다”며 “말로 하기 쑥스럽거나 애매한 감정을 편지로 전한다”고 귀띔했다.

현선 씨는 “수능 보는 날 아빠가 시험장까지 태워준 후 ‘시험 전에 읽어보라’며 편지를 건넸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현선 씨는 밸런타인데이에 이 팀장 몰래 회사에 초콜릿과 편지를 보내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팀장은 “가정이 화목하니까 항상 마음이 즐겁고 회사 일도 술술 풀린다”고 말했다.

‘잘 놀아야 일도 잘한다’는 이른바 ‘펀 경영’을 가정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

그가 말하는 ‘가정에서의 펀 경영’ 노하우는 이렇다.

먼저 ‘∼때문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바꿀 것을 권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하라는 것. 또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보다 부모가 집에서 책 한 페이지라도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자전거처럼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가정의 펀 경영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이 팀장은 요즘 요리하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두 달 전부터 요리학원에서 양식 요리를 배우고 있다. 주말 저녁 식사는 이 팀장의 몫이다.

주말 요리에 들어가는 비용은 월 4만∼5만 원.

“직접 요리를 하면 비용이 절약되지만 무엇보다 제가 만든 음식을 아이와 집사람이 좋아합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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