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4년 제1땅굴 발견

  • 입력 2004년 11월 14일 18시 09분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다.”

1971년 김일성은 당과 인민군에 남침용 땅굴 공사를 지시했다. 이른바 ‘9·25 교시’.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군의 ‘두더지 작전’에 감동한 김일성은 ‘요새화된 현 전선을 돌파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으로 땅굴을 제안한 것.

그로부터 3년 뒤 11월 15일, 경기 연천군 일대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국군 9명은 땅에서 정체불명의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30여분 동안 땅을 파헤치자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야심어린 침투로가 발각되는 순간 북한군은 군사분계선 너머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제1땅굴 발견에 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땅굴은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앞둔 지점까지 뚫려 있었다. 바닥에는 레일이 깔려 중화기도 운반할 수 있었다. 군은 이 땅굴로 1시간에 연대급 병력이 이동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사실상의 무력남침”이라며 북에 항의했다. 유신반대 장외투쟁 중이던 야당도 국회로 돌아와 규탄결의안에 동참했다. 그러나 북은 “날조된 기만극”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후 정부는 본격적인 땅굴 찾기에 나섰다. 미국 정보 당국은 땅굴이 20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땅굴 공사에 동원됐던 귀순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비무장지대를 뒤졌다. 하나 뚫는 데 1000만원이 드는 시추공을 3600개나 뚫었다.

그 결과 1975년과 1978년, 1990년에 땅굴을 추가로 찾아냈다. 특히 제3땅굴은 지하 73m 깊이에 폭 2m의 대형인 데다 남측 출구가 세 갈래로 갈라진 사실상의 ‘전술 도로’여서 충격은 더욱 컸다.

1991년 걸프전 당시 군의 1단계 위기조치가 제3땅굴 봉쇄였으니 땅굴은 유효기간이 지난 ‘안보 관광지’가 아닌 현실적 위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육로로 남북이 왕래하는 지금 지하 침투로가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김정일은 ‘한 개의 핵폭탄이 갱도 100개보다 위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땅 밑에 병력 대신 핵을 숨겨 두려 골몰하고 있다.

남측도 변했다. 한 줄기 수증기를 보고 땅굴을 찾아내던 군이 이제는 철책을 뚫는 ‘민간인’도 보지 못한다니….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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