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잭 다니엘, 신화가 된 사나이’…위스키 신화

  • 입력 2004년 9월 3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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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네시주 린치버그에 있는 ‘잭 다니엘 증류소’. 사진제공 한국브라운포맨
미국 테네시주 린치버그에 있는 ‘잭 다니엘 증류소’. 사진제공 한국브라운포맨
◇잭 다니엘, 신화가 된 사나이/피터 크래스 지음 박수현 옮김/285쪽 1만1000원 모티브북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포크너도,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도,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도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에드거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전 국장도 업무로 녹초가 된 날엔 꼭 ‘그’를 찾았다. ‘그’는 바로 ‘잭 다니엘스(Jack Daniel’s)’. 미국 테네시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밀주(密酒)로 시작된 위스키다.》

이 책은 위스키 이름의 주인공인 실존 인물 잭 다니엘이 어떻게 빈털터리 고아에서 소년 증류업자가 돼 자신의 이름을 딴 위스키를 만들어내게 됐으며, 극심했던 금주운동에 맞서 사업을 성장시켰는지를 다룬 전기다.

그의 정식 이름은 재스퍼 뉴턴 다니엘. 1849년 미 테네시주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 집안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세 때 고아가 된 그는 테네시주 린치버그의 댄 콜 집에서 옥수수 농장 일을 거들어주며 살게 된다. 불법 위스키 증류소를 가지고 있던 콜에게서 증류법을 배우면서 그는 위스키가 옥수수 경작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위스키에 푹 빠져든 그는 ‘너무 달아서 자칫 싸구려 위스키가 될 수 있는 달콤한 맛보다는 톡 쏘는 맛의 시큼한 위스키(Sour Whiskey)’를 선택했다. 사탕단풍나무 숯을 통해 증류한 위스키를 한 방울씩 여과시키는 ‘링컨 카운티 공법’으로 제조한 그의 술은 술꾼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6세의 ‘소년 증류업자’가 된 그는 다른 마을까지 진출해 위험을 무릅쓰고 밀주를 판매했으며, 마침내 1875년 합법적인 증류소를 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금주운동이 점점 거세지던 1896년까지 22년간 그는 500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는 등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한다.

그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소속 카운티 내 모든 교회에 기부금을 냈고 학교 등 지역사회활동에도 앞장섰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교회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증류소 영업을 방해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탁월한 마케팅 감각의 소유자였다. 위스키에도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술에 ‘올드 넘버7(Old No.7)’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고, 유리술병 시대가 되자 가격이 저렴하고 포장이 쉬운 둥근 술병 대신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네모난 술병을 고집했다. 그는 “둥근 병들 사이에서 눈에 띌 수 있는 ‘사각형(square)’의 술병은 ‘정직한(square)’ 판매상을 상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각형 병은 오늘날까지 잭 다니엘스의 독특한 스타일로 남아 있다.

‘올드 넘버7’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하루 300갤런 생산’ 원칙을 고수하며 품질 관리에도 신경 썼던 그는 1904년 마침내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에서 금상 수상으로 ‘세계 최고 위스키’의 명성을 거머쥔다.

사업가로서의 성공과 달리 그의 개인적인 삶은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158cm의 단신임에도 능숙한 춤 솜씨로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기름진 음식과 과도한 알코올 섭취로 건강이 악화됐다. 자식이 없던 그는 1907년 두 조카에게 모든 사업을 넘겼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오래전에 다친 다리가 썩어 들어가자 한쪽 발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애주가들의 벗이 된 이름을 남긴 채 그는 1911년 62세로 숨졌다. 원제는 ‘Blood and Whiskey:The Life and Times of Jack Daniel’(2004년).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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