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40>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8월 25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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彭城에 깃드는 어둠(7)

아들이 보낸 사자를 맞은 왕릉의 어머니는 한동안 태연한 목소리로 왕릉이 항왕의 뜻을 따르도록 달래는 척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자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라건대 이 늙은 어미를 위해 내 아들 능(陵)에게 전해주게. 너는 옳은 주인을 만났으니 부디 한왕(漢王)을 잘 섬기라고. 한왕은 너그럽고 어진 분이라 마침내는 천하를 얻으실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이 늙은 어미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이제 나는 죽음으로 사자를 배웅해 내 이 뜻이 참됨을 보이겠네!”

그리고는 품안에서 칼을 빼내더니 그 위에 쓰러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릉의 어머니가 그렇게 죽자 항왕은 불같이 노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왕릉의 어머니를 가마솥에 삶게 하는 한편, 왕릉이 보낸 사자를 목 베어 분을 풀었다. 그리고 사마용저에게 날랜 3000기를 내어주며 명을 내렸다.

“너는 얼른 양하(陽夏)로 달려가 왕릉이 관중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으라! 곧 종리매에게 대군을 딸려 보낼 테니 우선 왕릉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목만 막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팽성에도 왕릉의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항왕 아래 들게 되었지만 건달 시절부터 왕릉을 우러르던 사졸 하나가 왕릉의 어머니가 삶기는 걸 보고 의분을 참지 못했다. 빠른 말 한 필을 구해 지름길로 왕릉에게 달려가 그 일을 알렸다.

한동안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리던 왕릉이 부드득 이를 갈며 설구와 왕흡에게 말했다.

“두 분 장군께서는 한왕의 가솔을 모시고 어서 양하를 지나 함곡관으로 가시오. 함곡관은 이미 한왕께서 손에 넣으셨다니, 급히 길을 재촉하면 별일 없이 한왕의 가솔들을 관중으로 모셔갈 수 있을 것이오.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불구대천] 법, 나는 이 길로 팽성으로 쳐들어가 항우와 싸우다 죽겠소!”

설구와 왕흡이 그런 왕릉을 말렸다.

“군자의 원수 갚음은 백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소인의 효도와 필부의 용기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지금 팽성에는 천하를 멍석 말 듯하여 함곡관에 든 지 한 달 만에 진나라를 멸망시킨 서초(西楚)의 50만 대군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장군께서 이끌고 계신 군사로 그곳을 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 차라리 관중으로 들어가 뒷날을 기약함이 어떻겠습니까? 한왕께서 다시 관동(關東)으로 대군을 내실 때 장군께서 그 이빨과 발톱[爪牙]이 되신다면, 부모 죽인 한을 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평정의 큰 공업을 아울러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거듭 달래자 마침내 왕릉도 군사를 움직여 양하를 벗어났다.

한편 사마용저를 재촉해 보낸 항왕은 또 종리매를 불러 급히 3만 대군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군사라 그날로 사마용저를 뒤따라 보낼 수가 없어 속만 끓였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사마용저가 빈손으로 돌아와 알렸다.

“대왕께서 내리신 3000기와 더불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양하로 달려갔으나, 왕릉은 이미 반나절 전에 그곳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뒤쫓아 보려 해도 이미 날이 저문 데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이렇게 돌아와 아룁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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