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 입력 2004년 7월 19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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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이 무너져내리던 1944년 7월 20일, 독일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야전사령부 ‘늑대의 소굴’.

히틀러가 군 수뇌부와 회동하기 위해 나타나기 직전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을 ‘심어 놓고’ 사라졌다. 시한폭탄이 든 가방은 히틀러의 바로 옆자리 테이블 밑에 놓인다.

그러나 신의 가호(?)였을까. 장교 한 명이 무심코 가방을 밀치고 말았으니.

폭탄은 정확히 오후 12시42분 폭발했으나 ‘사정권’에서 떨어져 있던 히틀러는 살아남았다. 그는 오른팔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암살 기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날 예정대로 무솔리니를 만났다.

귀족 출신으로 생래적으로 히틀러를 혐오했던 슈타우펜베르크. 그는 바로 체포돼 사살된다. 게슈타포는 200명을 처형했다.

주모자 8명은 피아노줄에 목이 감긴 채 정육점 갈고리에 매달려졌다. 그 고통스러운 죽음은 카메라에 담겨 히틀러에게 보내진다.

암살 계획을 알고도 침묵했던 로멜에게는 명예로운(?) 음독자살이 권유됐다. 그는 그 제의를 따랐고, 생전의 모든 명예를 그대로 간직한 채 땅에 묻혔다.

1941년 북아프리카의 전선에서 본부의 퇴각 명령에도 진격을 고집해 승승장구했던 ‘사막의 여우’ 로멜.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띄웠다. 그의 존재는 ‘국가적 환각제’나 다름없었다.

‘로멜의 신화’는 연합군에 큰 짐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서 “유감이지만 상대에게도 뛰어난 장군이 있다”고 토로했다.

1943년 그는 히틀러의 직접 지시를 무시하고 퇴각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는 주화파(主和派)로 돌아섰다.

히틀러에게 여러 차례 강화협상을 제의했으나 묵살되자 독자적인 ‘종전(終戰)계획’을 추진했다. “군사적으로 실패한 전쟁은 정치력으로 변제해야 한다!”

실패한 암살 기도는 독일에 ‘마지막 기회’를 앗아갔으니.

그는 충실한 나치는 아니었으나 반(反)나치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장래를 걱정했고 나치의 비인도성을 혐오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히틀러를 경외했다. 스스로 ‘모순(矛盾)’을 살았다.

그는 결국 나치와의 관계를 ‘명예로운 불신임’으로 끝맺는다.

“로멜에게 인생은 담담한 산문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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