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군번

  • 입력 2004년 5월 3일 18시 51분


주민등록번호, 은행계좌번호, 자가용 차 번호에서부터 자기만 아는 온갖 비밀번호까지, 세상살이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숫자도 점점 늘어간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은 여기에 하나 더 자연스럽게 암기하는 숫자가 있다. 바로 군번이다. 군번은 군인의 고유번호다. 제대한 뒤에도 오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군인들이 군번 인식표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전사했을 때 이 사이에 끼워 놓아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군번은 수십년이 흐른 뒤에도 유용하다. 지난해 말 귀국한 국군포로 전용일씨는 한때 국방부의 군번 확인과정에 착오가 있었지만 뒤늦게 실수가 확인되면서 귀환에 성공했다. 전씨가 50년 이상 북한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군번 ‘0676968’만은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주 딸의 품에 안긴 유골로 귀국한 국군포로 백종규씨의 사례도 백씨가 살아생전 딸에게 자신의 군번 ‘1504895’를 외워두도록 한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군번을 외우는 것을 보면 군번은 이들에게 ‘생명선’이었던 셈이다.

▷엊그제 강원도 홍천에서 ‘1125518’이라는 군번이 찍힌 인식표가 발견됐다.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와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군번의 주인공은 1950년 12월 홍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이만초 상병.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분으로 확인됐다. 54년 만에야 햇빛을 보게 된 그의 호국혼(護國魂)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6·25전쟁 때의 전사자 중 유해조차 찾지 못한 분들이 무려 10만3000여명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국방부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이 중 970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지금도 이 땅 구석구석에는 ‘이만초 상병’과 같은 분들이 수없이 묻혀 있다는 얘기다. 지하에 계신 그분들은 요즘 한국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궁금하다. 이 땅에서 전쟁의 가능성이 엷어져 간다고 안도하고 계실까? 아니면 나라 지키는 일에 해이해진 듯 보이는 후손을 보고 염려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송문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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