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태현/테러 '강 건너 불' 아니다

  • 입력 2003년 11월 23일 18시 46분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제정치학 테러가 또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군 점령하의 이라크에서 저항세력에 의한 대(對)미군 테러 행위가 빈발하더니, 최근에는 그 대상이 확대돼 이탈리아군이 희생됐다. 현지의 우리 국회조사단도 위험에 처할 뻔했다. 터키에서도 대규모 테러가 일어나 영국총영사관이 파괴되고 총영사를 비롯한 다수가 희생됐다. 대표적 테러조직 알 카에다는 미국 본토와 일본에 대한 테러 위협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표적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 테러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도대체 테러의 끝은 어디인가.

▼신자유주의 흐름 속 私的폭력 ▼

지금은 지구상의 땅덩어리 어느 한 조각도 어느 나라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고 60억명이 넘는 인구 중 누구 하나도 어느 나라의 국민이 아닌 이가 없는, 국민국가의 시대다. 그러한 시대에 영토에 기반을 두지 않은 비국가적 행위자가 이처럼 기세등등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하물며 역사상 존재했던 어느 나라보다도 강대한 미국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테러와의 전쟁을 2년간이나 펼쳐 왔음에랴. 주권국가 위주의 국제정치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게 됐다.

국민국가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다. 국가만이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고 모든 사적(私的) 폭력은 현실적으로 배제된다. 반면 테러는 기본적으로 사적인 폭력이다. 국민국가의 시대에 국가권력과 사적 폭력은 서로를 부정하는 제로섬 혹은 천적의 관계에 있다.

사적 폭력은 국가권력이 현실과 명분에서 약화될 때 일어난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려면 그럴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성공하려면 국가권력에 빈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명분의 약화는 그 효율성마저 저해한다. 국민의 자발적 협조가 없을 경우 강제력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그 행사가 지나치거나 모자랄 때 훼손된다. 즉 국가권력의 행사가 개인 권익의 보호를 넘어 그것을 침해할 때, 혹은 그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 때 그 정당성이 약화되고 사적 폭력에 명분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경우는 지나쳐서인가 아니면 모자라서인가? 필자가 보기엔 모자라서이다.

근대사에서 국가 대 사회의 관계는 상호 강약의 주기가 교차해 왔다. 18세기 중반까지는 국가가 압도적으로 강하던 절대왕조 시대였다. 자유방임주의가 지배한 19세기에는 국가의 역할이 야경(夜警)에 국한되었다. 그 결과는 부의 편중과 시장의 실패였고, 결국 20세기는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역할이 다시 강화되었다.

20세기 말엽에 불어 온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국가의 약화를 요구했다. 시장에 대한 신뢰로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그 결과 개인은 무자비한 시장 속에서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발전 수준이 지역별로 엄청난 편차가 있는 오늘의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불어 닥친 신자유화의 바람이 결국 국가권력에 빈틈을 만들어 주었다. 테러라는 사적 폭력은 그 빈틈을 뚫고 자라고 있다. 테러는 결코 중동과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테러의 시대인가. 그건 아니다. 자살공격이 암시하듯 테러의 자기파괴적 속성 때문이다. 테러의 위력은 불특정성과 그것이 주는 공포에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테러, 즉 공포를 주는 것이다. 테러를 두려워하는 것은 일부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테러는 절대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국가권력에 대한 의존이 커질 뿐이다. 그래서 테러는 안으로 스스로의 기반을 파괴하고 밖으로 그 천적을 강화시키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 필요 ▼

테러가 기승을 부릴수록 각국은 내부적으로 대테러 조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테러 방지를 위한 국제협력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테러방지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그러나 일부 인권단체에서 우려하듯이, 그리고 미국에서 이미 그렇듯이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제약을 가한다.

법을 만들더라도 테러 예방의 핵심은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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