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엉터리 태극기'

  • 입력 2003년 10월 3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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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국기는 그리기가 쉽다. 한두 가지 색에 모양도 단순해서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구성과 모양이 꽤 복잡하다. ‘태극기를 그려 보라’는 시험문제가 나온다면 틀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태극문양 주위의 네 귀퉁이에 그리는 4괘(卦)의 모양과 배치다. 4괘가 각각 상징하는 의미도 어렵다. 이 중 건(乾)은 하늘 봄 동쪽, 곤(坤)은 땅 여름 서쪽, 이(離)는 해 가을 남쪽, 감(坎)은 달 겨울 북쪽을 나타낸다.

▷조선말 고종 시절 처음으로 만들어진 국기는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고 한다. 빨강 파랑 노랑의 3태극을 중심으로 주위에 8괘를 그렸다. 그러다가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면서 배 안에서 이를 태극문양에 4괘가 있는 형태로 수정한 후 숙소에 내걸었다. 이것이 태극기의 시초다. 이후 구도나 제작방식에서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처럼 복잡하고 의미도 어려워서일까. 그동안 태극기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엄숙함과 경건함이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함부로 만지거나 구기면 안 됐고 더러워지면 빠는 대신 곱게 태워야 했다.

▷그처럼 엄숙하기만 했던 태극기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지난해 월드컵 때다. 한국전이 열릴 때마다 태극기가 응원용 치마, 바지, 망토, 두건 등으로 거침없이 사용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경기장에는 수기만 등장했지 태극기 의상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성불가침의 영역 중 하나였던 태극기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바람에 태극기 복장 제조업체가 톡톡히 재미를 봤다던가. 지금도 한국전이 열리는 경기장에선 태극기 의상을 한 응원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태극기가 우리에게 ‘친숙한 물건’이 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먼지와 매연에 찌들어 흰 바탕이 검게 변한 태극기가 길거리에 그대로 방치되거나, 잘못 그려진 태극기가 버젓이 내걸리는 따위의 일은 없어야 한다. 엊그제 국군의 날 대통령이 탄 사열차량에 그런 엉터리 태극기가 게양된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나라를 수호하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군인들이 대통령 참석행사에 그런 실수를 하다니 실망스럽다. 설사 대통령 의전차량이 아니더라도 문제가 없는지 꼼꼼히 따지고 살폈어야 했다. ‘대통령 차량의 엉터리 태극기’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일 없는 요즘의 어지러운 시국을 상징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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