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명/답답한 '국정원장 청문회' 그후

  • 입력 2003년 4월 28일 18시 30분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가 민감해질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국회 모두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어 서로 대표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중 정통성’에 따른 갈등이다. 특히 이른바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이런 갈등의 우려가 매우 높다. 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원만한 국정 운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국회 모두 정치의식이 높아야 한다.

▼대통령-국회 감정싸움 해서야 ▼

요사이 우리 정가에서 일어난 일은 이런 성숙한 정치의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의 임명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국회는 지금 자존심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되도록 양비론(兩非論)의 ‘무책임한’ 방패 속에 숨고 싶지 않은 필자로서도 이번엔 양비론을 펼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왜 굳이 고영구씨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무시하고 자신이 칼자루를 쥐겠다고 나선 것도 잘못이라 보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이 고영구씨를 국정원장으로 지목한 것 자체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경력으로 볼 때 국가인권위원장쯤이 어울리지 아무리 민주화시대라고 해도 대공수사를 하는 국정원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 국민 대부분의 의견일 것이다. 국회 정보위원회가 제시한 ‘부적절’ 의견에 대해 대통령이 거친 표현을 쓴 것도 잘한 일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위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도 더 절제된 말과 행동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쨌든 국정원장의 임명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청문회를 거쳐 ‘부적절’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국회의 권한이지만 과연 국회나 한나라당이 의견을 제시하기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한나라당은 고영구씨의 임명을 취소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그것은 대통령의 표현대로 ‘월권’의 소지가 크다. 게다가 국회 정보위원회는 특성상 불가피한 점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과거 공안정국을 주도하던 사람들과 보수인사 일색으로 구성되어 국민의 참 의견을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다. 국정원이 과거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한 것도 사실이고, 그에 맞장구치던 인사들이 고영구 청문회를 주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이 이 문제를 추가경정예산안 심의와 연계시키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나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국회에서 ‘국정원장 해임권고 결의안’이나 ‘사퇴권고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이다. 일도 시작하기 전에 부적격자로 낙인찍는 것보다는 업무 수행의 문제가 있을 때 해임 건의를 하면 되는 것이다. 국정원이 너무 중요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대통령도 역시 법이 정한 절차와 권한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한편으론 대통령이 왜 야당과의 갈등을 자초하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그가 공약한 개혁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다. 개혁 우군들을 최대한 확보해 나가야 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정말 쓸데없는 갈등을 자초하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의아스러울 만큼 유화적으로 변한 그가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는 왜 이렇게 서투른지 이해되지 않는다.

▼개혁 바쁜데 왜 野와 갈등하나▼

고영구 파동으로 불거진 대통령과 국회(실은 한나라당)의 갈등은 겉으로는 이념을 둘러싼 국가 운영 방향 때문인 것 같으나 사실 그보다는 양쪽의 감정싸움이 핵심이다. 어느 쪽도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그동안 이룩한 제도의 발전에 비해서는 많이 뒤떨어져 있다. 지금의 갈등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나 민생 안정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것이다. 많은 부분이 서투른 언행에서 불거졌다. 지금이라도 양쪽은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동하되 상대방에 대한 정치 윤리를 지키는 성숙한 타협의 모습을 보이기 바란다.

김영명 한림대 사회과학대 학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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