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일할 수 있는 권리

  • 입력 2002년 12월 17일 19시 10분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젊은이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심정은 어떤 것일까. ‘모든 게 끝났어/이젠 막막해/대책은 없고 사람도 싫고/가족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나 많이 변할지 몰라.’ 어느 젊은이가 남겼다는 이 메모는 청년실업 문제가 요즘 젊은 세대를 좌절과 절망으로 끝없이 몰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일에도 이들은 지쳐버린 것 같다. 가수 밥 딜런은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노래했지만 이러한 꿈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청년실업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장·노년층의 일자리 문제다.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나는데도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은퇴연령은 급속히 낮아지고 있다. 이들은 노후연금이나 자식들의 효 등 사회와 가족 어느 쪽에도 ‘기댈 언덕’이 마땅치 않다. 따라서 직장에서 밀려난 이후 일자리가 이어지지 않으면 신(新)빈곤층으로 황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는 그나마 인터넷 등 새로운 환경과 친숙하지만 장년층 이상은 그렇지도 못하다. 시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디에다 하소연 한번 제대로 못하고 꼼짝없이 주변부 인생으로 전락할 운명이다.

▷사자나 호랑이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을 때 죽음을 맞는 것처럼 인간도 생물학적으로 평생 일을 계속하도록 태어났다.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 장수의 가장 큰 비결은 평생 일을 놓지 않는 것이다. 원시사회에 인간은 나이에 상관없이 먹을 것을 찾아 산야를 누벼야 했다. 농경사회에서도 노인들은 생산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근로 행위는 이처럼 신과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노인들이 일손을 놓은 것을 두고 과연 사회와 역사 발전에 따른 ‘혜택’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근로의 권리’는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근로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기본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계층이 여기서 소외되어 있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 크다. 우리와 대조적인 것이 최근 고령화 추세에 따라 65세 정년을 없애겠다고 발표한 영국 정부다. 정부가 앞장서 ‘노년의 품위’를 지켜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55세 정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마음에 앞서 우리 정부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역시 무늬만 ‘국민의 정부’였던가. 국민이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그토록 요원한 일인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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