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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31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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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피의자 사망사건▼
지고의 가치처럼, 천하의 복음처럼 활자로 박아놓은 헌법 기본권 조항에서 문장론의 허점을 구실삼아 펼친 그 농담에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통찰과 풍자와 진실이 담겨 있다. 헌법은 계속 말한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하고,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헌법은 국가에게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침해당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없어진 듯하지만 실상 늘 일어나고 있고, 요행히 발각되면 보도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될 뿐이다. 수사의 1번지라 할 수 있는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조사받던 피의자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떠올린 생각이다.
이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이유는, ‘아직도 원시적 형태의 인권 침해가 이 땅에 존재하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수사관이 무릎으로 피의자 머리를 깔아뭉개고, 욕설을 퍼붓고, 주먹으로 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백색 테러가 새 세기에도 남아 있느냐에 대한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요 착각이다. 그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순간이나마 그런 마비된 일차원적 행복에 빠지게 한 것도 역시 고문을 자행하는 국가의 대중조작 탓이다. 대세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언론과 지식인의 책임도 묻어 있다.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문민과 국민의 정부를 이루고, 경제위기도 그럭저럭 넘기고, 정치개혁만 약간의 과제로 남겨둔 채 시절도 새 천년을 맞은 터에, 인권은 이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분위기를 잡지 않았는가. 민주화 과정에 인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었고, 바야흐로 새 물결의 정점에 휘날리는 기치는 ‘포스트 민주화’라고 논리를 만들고 있지 않았는가.
검찰청 조사실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 하나를 빌미잡아 이 ‘희망찬 파도’의 발목이나 붙들자는 심사가 아니다. 이즈음에 일어난 것만 추려 안팎의 광경을 살펴보자.
발단의 경위가 썩 유쾌하지 못하지만, 국가정보원의 도청과 불법 감청 행위는 우리의 양심을 진저리치게 한다. 국가란 마음만 먹으면 내 책상 위의 전화기나 친구 호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단번에 공개된 일기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는 가외의 소득도 있었지만 비밀의 무덤은 내 가슴만이 아니라는 현실의 좌절감은 정말 쓰라리다.
모스크바 뮤지컬 극장에서 벌어진 체첸 반군의 인질극과 그 진압 작전은 어떤가. 러시아 정부는 언론을 통제해 현장 상황을 호도하고, 살인 가스를 살포하고, 총격을 퍼부었다. 미국 신문은 인권 유린의 인질극을 인권 무시의 수단으로 해결한 이 결과를 두고 ‘모스크바의 학살’이라고 썼다. 그런 미국은 또 어떤가. 워싱턴 일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차별 총격 사건에서는 그 원인을 침착하게 따지기보다 용의자를 체포하자 즉각 사형 방법부터 거론한다. 인권을 자국의 거울로 삼기보다 국제정치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즐기는 미국다운 모습이다.
▼잠시만 소홀해도 침해 가능성▼
지금이 이러한데, 새 패러다임의 구호에만 집착해 인권 문제를 낡은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새 시대와 이념이 아무리 황홀해도 근본 가치의 배경 없이는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성숙도가 높다 하더라도, 단 한 건의 무고한 일이 생겨도 그 사회의 인권보장은 허물어지고 만다. 인권은 그토록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한 불가사의의 덕목이므로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차병직 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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