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남자를 열광시키는 '武와 俠'의 세계 '비호'

  • 입력 2002년 6월 21일 19시 00분


◇ 비호 (전 6권)/김광주 지음/각권 250면 내외 각권 7800원 생각의 나무

이 책 ‘비호’ 얘기에 앞서 나도 축구 얘기를 해 보자. 한국 축구가 월드컵 8강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면 4강)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소회에 사로 잡혔다. ‘각본 없는 드라마’ 라는 말이 실감났다.

축구에서 우리가 후련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축구가 동일한 룰의 적용을 받는 힘과 지략의 대결장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조국과 자신의 영예를 위해 숱한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건다는 점에서 축구는 ‘무(武)’와 ‘협(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약세에 있는 편이 ‘무’와 ‘협’으로 무장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축구 선수나 무협소설 속 협걸이나 모두 함께 꾸는 꿈이다. 축구에서 ‘무협’의 메시지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지나친 비약만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협걸과 정복자는 다르다. 잉카 문명을 초토화 시키면서 조국에 황금의 부를 안긴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정복자는 될지언정,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가 이미 룰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무협소설 속에는 협걸만이 등장할 뿐 정복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발원한 ‘무협소설’은 이처럼 서양의 정복과 평정의 서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의리와 인정에 기초한다.

‘무협지’라는 말로 평가절하 되었던 무협소설은 사실 동아시아적 상상력이 고유하게 깃들어 있는 고급한 동양의 서사 장르이다. 무협소설의 기원은 중국의 경우, 사대 기서로 일컬어지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수호지’ ‘금병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환타지적인 요소와 처세의 철학이 가미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무협소설이 창작되었다.

김광주의 ‘비호’는 ‘정협지’와 더불어 한국 무협소설의 효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1960년대, 극심한 빈곤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들에게 더없는 오락과 위안을 주었던 연재소설의 진보였다.

‘비호’라는 별칭을 지닌 주인공 냉운헌은 얼음 같은 분노를 간직하고 자신의 스승을 죽인 흉수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기나긴 장정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 닥치는 다양한 파노라마적 체험은 어떻게 보면 남성적 삶의 거대한 메타포로 읽힌다. 무협소설의 세계는 어쨌든, 남성의 세계이다. 악한 자는 죽고 선한 자는 반드시 성공하는 무협소설의 서사적 설정은 남성들로 하여금 의로운 일에 당당해 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호연지기와 더불어, 삶에의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오로지 부를 획득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길로 제시되며, 자기 개발과 자기 선전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정력을 소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남성들임에랴.

우리 한국 남성의 삶은 국가와 기업의 주도 아래 자본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에 끼워진 채 일률적으로 구획되어 있는 형편이다. 자본의 논리와 부합하지 않는 것들, 즉 정의감과 극기를 통한 완성과 용맹성 등은 매도당하고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포획되고 닫힌 사회 속에서 ‘의와 협’이라는 무협 소설의 화두는 남성들에게 숨겨진 본성과 능력을 들추는 기제가 되기에 주목할 만하다. 오늘, 우리가 ‘비호’를 읽는 것은 그러므로 잃어버린 남성성을 희구하는 것과 어느 지점에서 절묘하게 맞닿는다.김 기 덕 문학박사·영상역사연구소장

popnamu@itre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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