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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2일 23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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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즉위 50주년)’ 축하행사를 지켜보는 영국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즉위 60주년)’와 비교할 때 천양지차가 느껴지기 때문.
먼저 행사 규모부터 크게 다르다. 100여년 전 빅토리아 여왕의 기념식 땐 11개 자치식민지 총리들이 런던으로 달려와 대기했고 여왕 행차는 캐나다 인도 호주 보르네오 키프로스 등 세계 곳곳의 식민지 병사들이 호위했다. 신장 2m의 거인 호위대장은 마치 영국의 국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4일 버킹엄궁에서 세인트폴 성당까지 예정된 엘리자베스 여왕의 기념행차에선 단 한 사람의 식민지 병사도 없다.
이제 영국의 식민지는 포클랜드제도 등 대서양과 태평양의 자그마한 섬들뿐이다.
당시엔 세계 곳곳에 여왕의 동상이 제막되고 여기저기서 화려한 축하 무도회가 몇 달간 쉬지 않고 열렸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시골시장 방문, 버킹엄궁에서의 음악회, 거리파티, 공무원들에 대한 기념메달 수여 등 엘리자베스 여왕의 기념 행사는 간소하기 짝이 없다. 줄을 이었던 열강들의 축하사절도 없다.
그러나 정작 영국 국민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초라한 기념행사가 아니다.
세계 육지의 4분의 1(2816만㎢)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은 100여년 만에 영토의 99% 이상을 잃고 24만4820㎢의 작은 나라로 쪼그라들었다.
당시 식민지였던 캐나다와 호주, 인도 등 53개국(파키스탄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탈퇴)은 영연방이라는 느슨한 형태로 연대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공통점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것뿐이다. 당시엔 전 세계의 강과 만, 폭포 등에 영국 여왕의 이름이 줄줄이 붙여졌지만 지금은 ‘전설’이 됐다.
이 같은 급격한 국력의 쇠퇴 탓인지 이번 주에 열리는 여왕의 축하행사를 보도하는 더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 선데이타임스 등 영국 신문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다.
선데이타임스는 50면을 할애한 2일자 특집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는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4일 열리는 기념식에서 ‘우리는 노력했다’고 우물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대영제국의 시민에서 ‘2류 열강’의 착한 시민으로 강등돼 있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니라고 전했다.
하종대기자 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