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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5월 28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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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의 제작진으로 참여한 ‘투숙객’은 내로라 하는 거물들이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이들은 벤더스의 초대에 어울리는 멋진 ‘손님’이 됐다.
벤더스의 87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베를린 천사의 시’가 베를린, 나아가 독일의 과거와 오늘을 다뤘다면 ‘밀리언…’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잡은 미국 사회의 그늘을 그렸다.
작품의 무대는 로스앤젤레스의 밀리언 달러 호텔. 이름처럼 고급 호텔이 아니다. 바퀴벌레라도 곧 튀어나올 듯한 낡은 건물에 부랑자와 정신병자, 창녀 등 밑바닥 인생들이 머물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좀 모자라는 톰톰(제레미 데이비스)이 호텔 옥상 위를 달리다 투신하는 것. ‘U2’의 감성적인 음악에 사랑하고 싸우고 울고 웃는 인간 군상이 느린 화면을 통해 어우러진다. 정작 콘크리트처럼 차가운 죽음을 선택한 톰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의외로 “죽은 뒤 알았다.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 완벽하다”는 역설적인 내레이션이다.
‘밀리언…’은 이야기보다 벤더스 특유의 어두우면서도 사색적인 화면을 타고 흐르는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호텔에서 죽은 마약환자 이지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톰톰의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다뤘다. 이 호텔의 투숙객들은 모두 ‘흘러간’ 인생들이다.
성폭력의 상처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창녀 엘로이즈(밀라 요요보치), 전설적인 록그룹 ‘비틀스’의 비밀 멤버라고 주장하는 딕시(피터 스토메어), 미술품 절도범 출신의 인디언 제로니모(지미 스미츠)….
고인 물처럼 변화가 없던 이들의 삶은 죽은 이지가 미디어 거물의 2세라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지고, 미 연방수사국(FBI) 특수수사관 스키너(멜 깁슨)가 수사를 위해 등장하면서 변화를 맞는다.
이 작품에서 범인을 찾는 ‘진실 게임’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권력과 소외된 이들의 갈등, 삶의 의미 등을 찾아나간다.
풍요로운 사회로 불리는 미국에 대한 벤더스의 시선은 차갑다. 미디어 거물은 아들의 자살을 알고서도 자신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게임은 끝났다(Game is over)”며 진실을 은폐한다. 투숙객이자 가장 가까운 톰톰의 동료들마저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톰톰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실은 없는가?
벤더스가 제시하는 것은 톰톰의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열정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지만 절박함과 순수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제5원소’ ‘잔다르크’의 밀라 요보비치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제레미 데이비스가 회색빛 화면에 어울리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영화 한편에 1000만달러(약 130억원) 이상의 개런티를 받는 멜 깁슨도 모처럼 ‘작은 영화’에 출연해 자기 몫을 해냈다.
‘U2’의 사색적인 음악은 또다른 영감을 준다. 이 그룹의 리더인 보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2000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3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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