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영언/전광판 문화

  • 입력 2002년 5월 27일 18시 56분


출근길 서울시청 앞을 지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월드컵 개막일이 며칠 남아 있는지를 알려주는 전광판이다. 오래전에 설치돼 서서히 월드컵 분위기를 달궈 주던 이 전광판의 숫자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오늘 표시는 ‘D-3’. 최근 몇 년 새 건물 경기장 지하철역 도로 등 전국 곳곳에 시민의 시선을 붙잡는 전광판들이 많이 생겨났다. 언론사 대기업 등 몇몇 대형건물의 옥상이나 벽면에는 TV를 몇 십 배 확대한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도시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대신 현수막들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

▷전광판의 원리는 간단하다. 일정한 모양의 판에 전구 또는 발광체를 바둑판처럼 촘촘히 배치하고 컴퓨터 제어로 이것을 점멸, 발광시킴으로써 글자나 도형 그림 등을 만들어낸다. 이들 전광판은 뉴스, 기업의 이미지 및 상품광고, 공익광고, 교통 환경 기상소식, 각종 문화행사소식 등을 내보낸다. TV도 그대로 볼 수 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지만 짧은 순간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효과가 상당하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는 ‘사랑한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등의 문구나 꽃그림을 집어넣어 개인적인 이벤트에 활용하기도 한다. 전광판 문화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축구대표팀이 맞붙은 엊그제 저녁 전국의 여러 대형 전광판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구중계를 지켜보며 멋진 골이 나올 때마다 환호성을 올렸다. 특히 대형 전광판이 4개나 있는 서울 광화문 일대의 분위기는 현장인 수원 경기장 이상이었다. 최소한 1시간 전까지는 현장에 도착해야 겨우 설자리나마 잡을 수 있었고, 늦게 간 사람들 중 일부는 차도를 ‘점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주변에 전광판이 있는 곳은 앞으로 귀빈석 일반석 입석 등으로 경계선을 그어야할 날이 올지 모르겠다.

▷축구경기를 전광판으로 관람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열린 광장에서 낯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어울리면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닫힌 경기장과는 달리 훨씬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데다 입장료가 ‘공짜’인 점도 매력이다. 바로 경기장 관람과 안방시청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TV가 처음 들어와 마을에 한 대밖에 없을 때 한곳에 모여 이를 시청하던 느낌과 비슷한 것 같다.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 아니 그 이상의 성적을 전광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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