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탈락 8순 실향민 자살…4차례 방북신청 좌절

  • 입력 2001년 10월 5일 23시 27분


이산가족 상봉자 추첨에서 잇따라 떨어진 80대 실향민이 임진각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일 오전 9시20분경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임진각 망배단 뒤 통일연못에서 황해도 신천이 고향인 정인국씨(82·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평동)가 물에 빠져 숨져 있는 것을 임진각 관리소장 김국현씨(46)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정씨는 연못 배수구 쪽에 주먹을 움켜쥔 채 엎어져 숨져 있었다.

숨진 정씨의 품에서 나온 수첩 안에서는 지난해 6월 신청한 이산가족 상봉신청서 접수증이 발견됐다. 경찰은 정씨가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투신하면서 교각에 머리를 부딪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정씨는 추석인 1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북쪽의 고향을 향해 차례를 지내고 3일 오후 집을 나간 뒤 4일 오후 함께 살던 아들 철규씨(48)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 “잘 있으라”고 짧게 말한 뒤 소식이 끊긴 것으로 밝혀졌다.

철규씨는 “아버지께서는 평소 ‘부모형제를 북에 두고 혼자 왔으니 죄인’이라며 괴로워하셨다”고 전했다.

정씨는 일제강점기 공무원으로 일한 탓에 친일파로 몰릴 것을 우려해 부모와 큰아들 철환씨(61)를 비롯해 4명의 누나와 남동생 1명 등 거의 모든 피붙이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해방 직후 부인 임영선씨(78)와 함께 작은아들 철수씨(56)만 업고 월남했다. 정씨는 15년간 경찰생활을 했다.

지난해 7월부터 네 차례 방북신청을 했으나 한 번도 뽑히지 못하자 정씨는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TV를 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유족들은 회상했다. 북에 두고 온 아들까지 5남1녀를 둔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중개업소를 하다 96년에 ‘고향이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며 고양시로 이주했다.

부인 임씨는 빈소가 마련된 고양시 덕양구 명지병원 영안실에서 “남편이 3년 전부터 ‘내가 죽으면 화장해 이북이 가까운 곳에 뿌려달라’고 하더니 큰아들 얼굴도 못보고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며 통곡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뜻대로 화장한 뒤 고향땅과 맞닿은 임진강에 뿌리기로 했다.

<파주〓이동영기자>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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