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실패학’이 필요한 정부

  • 입력 2001년 10월 4일 18시 35분


삼성에버랜드는 고객의 불만이 접수되거나 업무 처리 과정에서 직원의 잘못이 확인되면 ‘실패 파티’를 연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팀원들에게 실패 사례를 발표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한다. 참석자들은 회사측이 제공한 케이크와 음료수를 함께 들면서 동료를 격려한다. 당연히 인사상 불이익도 없다. 실패 경험은 데이터베이스로 관리돼 공유된다. 언뜻 보면 ‘자아비판제’를 연상시키지만 이 파티는 해당 직원을 벌주거나 질책하려고 여는 것이 아니다. 이 회사의 허태학 사장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건설의 현장소장들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공사를 진행하다가 판단 착오로 낭패를 볼 뻔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재발 방지를 다짐한다. 임승남 롯데건설 사장은 ‘실패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기업들은 실패에서 교훈을 찾는 데 열성이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망칠 경우 문책보다는 실패의 근본 원인을 발견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쓴다.

삼성은 최근 임원 교육용으로 배포한 ‘실패학에 대하여’라는 문건에서 “실패의 전 과정을 곱씹어보는 ‘실패 학습’이야말로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90년대 초 낙동강 페놀 오염의 주범으로 몰렸던 두산이 환경친화적 기업으로 거듭난 것도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은 모범 사례다.

그렇다면 잦은 판단 미스로 국가 경제에 여러 차례 손실을 초래한 정부는 어떤가. 정부의 실정(失政)은 일정 주기로 되풀이되지만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전임자 탓, 다른 부처 탓, 기업 탓으로 돌리는 데만 익숙하다.

기업들은 경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판단을 잘못해 규제완화 시기를 놓쳤다고 아쉬워한다. 민간에서 불고 있는 ‘실패학 연구’ 열풍이 관(官)으로 확산된다면 정책 오류에 따른 기회비용도 그만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박원재<경제부>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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