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윤득헌/보스턴의 4월

  • 입력 2001년 4월 17일 18시 23분


3월 로마마라톤에서 88세의 할머니가 42.195㎞를 완주했다. 마라톤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 그 나이에 7시간30분이나 달리는가. 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마라톤 동호인에게 한다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일단 마라톤을 해 보세요. 길이 있으니까 달리는 것이지요’라는 답변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함축적 의미는 ‘산이 거기에 있기에’ 등산을 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마라톤은 이제 선수 몇 사람의 스포츠가 아니다. 3월 동아마라톤도 참가 희망자가 너무 많아 1만 명으로 제한했을 정도다. 마라톤 동호인들의 관심사는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마라톤에 깊숙이 빠진 동호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보스턴마라톤 참가이다. 가장 오래된 연례 마라톤대회이고, 코스 32㎞ 지점에 유명한 ‘심장 파열’이란 이름의 언덕(heart break hill)이 있고, 기록으로 참가 자격을 제한하며, 완주자 이름과 기록이 현지신문에 게재되기 때문일 것이다.

▷보스턴 마라톤이 동호인 및 우리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우리의 어떤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다. 서윤복 선생이 해방 후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보스턴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우리에게 희망과 자신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서 선생이 배를 타고 귀국한 인천항은 당시 그야말로 태극기의 물결과 인파로 넘쳤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는 서울 시민이 마련한 환영식에서 “네가 해냈구나. 나는 오래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신문에 많이 나오지 못하는데 너는 2시간 여 달리고 연일 신문의 조명을 받는구나”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또 김구 선생은 ‘족패천하(足覇天下·발로 천하를 제패했다)’는 휘호를 써 주며 감격을 함께 나누었다. 김구 선생의 휘호는 대리석에 새겨져 지금 서 선생의 모교인 숭문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그 보스턴마라톤 105번째 대회에서 이봉주가 이마에 태극마크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오래 전의 감격을 되살렸다. 성실함의 표본으로 자리한 ‘봉달이’ 이봉주의 우승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희망의 달이라고.

<윤득헌논설위원>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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