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찬식/‘공연없는 날’

  • 입력 2001년 4월 15일 19시 26분


문화계가 들끓고 있다. 문화예술단체들이 기업체 등의 기부금을 받지 못하도록 명시한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 때문이다. 만약 원래 법안대로 시행된다면 문화 단체들은 외부 협찬금을 일절 받을 수 없다. 문화행사를 개최할 때 입장료만 받아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는 문화계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조치다. 그래서 문화계 인사들은 문화의 싹을 자르는 것이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문화계는 이에 맞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2일 하루를 ‘공연 없는 날’로 정해 전국의 모든 공연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정부 여당이 ‘파업’ 하루 전인 11일 입법예고안을 전격 철회함으로써 실제 중단 사태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번 파문은 ‘점잖은’ 문화계 인사들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업 선언’까지 하면서 ‘과격하게’ 대응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기부금 문제 때문이지만 밑바닥에는 최근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이 깔려 있다. 누적된 감정이 기부금 사태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문화계에 ‘비우호적인’ 정책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문예진흥기금과 미술품양도세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서정가제도 정부내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출판계가 얼마 전 온라인서점들의 할인 판매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용함으로써 결국 원칙이 훼손되고 말았다.

정부가 문화계에 들이댄 ‘칼날’은 한마디로 문화 분야에도 시장논리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문화계는 반대하지만 정부 주장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양쪽이 팽팽히 대립되는 사안이다. 하지만 정부내에서 이런 현안이 논의될 때 문화계의 반대 논리가 번번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문예진흥기금은 당초 방침대로 3년 앞당겨 내년 1월 폐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미술품양도세는 3년간 시행을 미루는 것으로 마무리돼 불씨를 그대로 남겼다.

따라서 문화계의 불만은 정부가 문화육성 의지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것과 문화관광부가 과연 문화계의 소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에 모아진다. 이 두 가지 중에서 비판의 화살은 역시 문화부 쪽에 쏠린다. 즉 문화부가 좀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문화부의 자세는 소극적이다. 기껏해야 간단한 방침 표명뿐이다. 기부금 문제의 경우 입법예고에 앞서 관련 부처들이 행정자치부에 의견을 제시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문화부는 마감 기한내에 의견을 제출하지도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문화부는 얼마 전 ‘천년의 문’ 백지화 조치처럼 정부 사업에 참여한 문화계 인사들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는 결정을 내려 반발을 사고 있다.

문화계의 불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힘든 여건에서 문화계가 이 정도나마 버텨 주는 게 고마워 보인다. 시장논리의 홍수 속에서 정부내에 문화계 주장을 대변하고 옹호할 부서는 문화부밖에 없다. 문화부의 ‘변호’가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고 아니고는 그 다음 문제다. 화창한 봄날과 대조적으로 요즘 문화계 인사들의 표정은 침울하다. 상실의 아픔에 빠진 사람들은 좋은 날씨가 오히려 반갑지 않다던가.

홍찬식<문화부장>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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