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한화 투수코치 최동원이 본 프로야구

  • 입력 2001년 4월 10일 16시 53분


선동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투수로 손꼽혔던 최동원(43)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여덟 시즌(83∼90)을 뛴 뒤 열 시즌을 야인(野人)으로 보냈다. 웬만한 선수 같았으면 1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팬들의 기억 속에서 이름 석자가 지워졌을 법도 할 일이다.

하지만 최동원은 달랐다.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카리스마는 광채를 더했고, 마침내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이것은 그가 현역시절부터 KBO(한국야구위원회)나 구단들과 날카롭게 각을 세웠던 ‘반골’이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로써 ‘튀는 선수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야구계의 불문율도 확실하게 깨진 셈이다.

“10년은 긴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야구를 완전히 떠났던 건 아닙니다. 야구계 근처에 머물면서 제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고 봐야겠죠. 사실 은퇴할 때도 코치로 오라는 팀이 있었지만, 저는 제대로 공부해서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껏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그가 유학을 다녀오고 해설을 하면서 야구와 인연을 맺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장감이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시범경기를 실전처럼 생각하며 신경을 집중하지만, 당분간은 적응하는 데 애를 먹을 듯하다. 그 자신도 “솔직히 부족한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야구장 밖에 머물면서 배운 경험이 소중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동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84년 한국시리즈다.

롯데와 삼성이 맞붙은 빅매치에서 그는 다섯 경기에 등판, 4승을 혼자 따내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후기리그 막판 ‘져주기 시합’을 하면서까지 롯데를 파트너로 선택했던 삼성은 다 잡았던 챔피언을 놓쳐야 했다. 최동원은 통산 103승 26세이브라는 빛나는 대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지도자의 길을 택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잊었다고 한다.

자칫 대스타의 위세에 주눅들지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그는 “살아온 환경이 다른 신세대들에게 옛날 얘기를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왕년의 대스타가 바라본 요즘 야구선수들의 모습은 어떨까.

최코치는 무엇보다도 근성과 팀워크의 부족을 지적했다. “뭔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근성이랄까. 그런 게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있어야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거든요. 또 한 가지는 예전에 비해 선수들끼리 뭉치는 분위기가 줄었다는 점이죠. 야구는 단체경기라서 구성원들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어린 선수들이 ‘우리’보다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이것은 야구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개성’이 중시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더구나 한화 이글스의 사령탑은 ‘자율야구’의 대명사인 이광환 감독이고 최코치 역시 선수 시절부터 자율성을 강조해온 인물이다. “야구선수가 프로에 들어올 정도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뭔가가 있는 겁니다. 그걸 코치가 바꾸겠다고 달려드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잘못 건드리면 선수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망가질 수도 있거든요. 코치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말 아니다’ 싶을 때만 잡아주는 게 최선이라고 봐요.” 말 그대로 선수의 장래를 내다보고 지도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즌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 하루 하루의 승부에 목을 매는 것이 코칭스태프의 숙명이다. 올 시즌 한화의 전력이 ‘3약’ 또는 ‘꼴찌후보’로 분류되는 점을 감안하면, 최코치의 소신이 얼마나 팀 운영에 반영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적을 내지 못하면 곧바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냉엄한 현실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구단이 바라는 야구는 이기는 것이지만, 팬들은 재미있는 야구를 보고 싶어하죠. 지금은 그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눈앞의 실적에만 급급하면 제대로 된 선수를 키울 수가 없거든요.” 최코치에게 맡겨진 임무는 사상 최악이나 다름없는 한화의 마운드를 꾸려가는 것이다.

99년 우승 멤버에서 정민철과 구대성이 일본으로 진출하고 이상목과 지연규가 부상을 당한 상황. 한마디로 차포를 떼고 전쟁터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최코치는 “남들이 약하다고 하니까 더 잘하고 싶은 오기가 생겨요. 힘들겠지만 우리도 4강에 도전할 겁니다”고 말한다.

시즌을 코앞에 두고 선발진조차 확정하지 못한 투수코치의 자신감, 그것은 아마도 ‘홈런을 맞더라도 정면으로 승부한다’는 최동원 특유의 신념이 만들어낸 부산물이 아닐까.

<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

▼'공포의 커브’ 누구에게 전수하나▼

현역 시절 최동원은 시속 150km에 달하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가 일품이었다. 직구 스피드만 따지면 그를 능가하는 선수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커브는 아직까지 그를 첫 손가락에 꼽는 야구인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최코치가 누구에게 공포의 커브를 전수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다.

최코치는 “배우고 싶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가르쳐줄 수는 없다. 커브는 아무리 던지고 싶어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공이다. 손가락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공의 회전력이 결정된다. 지금으로서는 조규수 투수가 커브를 구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동원은 지난 88년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선수회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롯데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그로부터 12년. 후배들은 지루한 싸움 끝에 선수협을 출범시켰다. 최동원으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선수협 얘기가 나오자 극도로 말을 아꼈다. “내가 생각했던 선수협은 선수들이 불이익을 당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후배들은 다소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동원은 한때 정계진출을 준비했다. 91년 지방자치제 선거엔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최동원을 잘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최근까지도 정치인의 꿈을 접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야구판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그에게 ‘정계복귀’ 가능성을 물었다. “제 인생의 최대 목표는 대통령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남들은 웃고 마는데, 저는 그 꿈을 버리지 않았어요.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을 떠난 정치, 서민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정치, 저는 그런 정치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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