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김윤식 문학기행

  • 입력 2001년 4월 6일 18시 49분


◇몽고 네팔 일 중 곳곳에, 한국문학 흔적 아스라히…

김윤식 지음

251쪽 8000원 문학사상사

이 책을 제목만 보고 그 흔한 문학기행서 쯤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국내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사가인 김윤식 서울대 교수의 넓고 깊은 사유, 역사에 대한 성찰, 문학에 대한 열정과 고뇌가 진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문학기행인가 하면 역사기행이고, 역사기행인가 하면 철학기행이다. 그리곤 어느새 종교적 실존적 사유 속으로 독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저자의 여행 무대는 몽골, 네팔, 일본, 중국. 많이들 가보았을 곳이지만 저자는 그 곳에서 우리 문학의 흔적과 향기, 거기 담겨 있는 한국사의 애환을 세심한 필치로 건져 올린다.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온갖 사유의 세계를 거닌다. 그 사유는 종횡무진이지만 거기에 일관된 그 무엇이 있다.

우선 몽골 기행. 전기를 꽂아야만 시동을 걸 수 있는 노새 같은 쌍발 비행기, 칭기즈칸이 군사훈련을 했다는 독수리 계곡 등 가난한 나라 몽골의 풍경이 쓸쓸하게 스쳐간다. 저자는 칭기즈칸의 유적지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몽골 소주나 마유주(馬乳酒) 대신 서양 포도주가 팔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 대목부터 그의 사유가 종횡으로 펼쳐진다.

“속물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업적 심리적 트릭이 포도주가 아니었을까? 얼치기 관광객들의 내면 심리를 심도 있게 간파한 상업적 기술이 거기 살아 숨쉬고 있지 않았던가. 이 얼치기들의 심리적 만족감으로서의 포도주….”

저자는 이내 미국의 문학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이야기한다.

“만일 이 나그네가 그래도 제법 근수 깨나 나가는 품종이라면 필시 그는 저 오리엔탈리즘의 내막에 접근해 갔으리라. 사이드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식민지를 미적으로, 오직 미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을 비판한 학자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을 두고 신비적이며 비논리적이며 여성적이고, 피와 엉켜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런 심리 경향은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얄팍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식민지를 대등한 ‘타자’로 본 것이 아니라 ‘미적 대상’으로 보고자 한 것. 이는 ‘식민지 백성이란 인간이 아니다’로 요약된다. ”

그리곤 이렇게 덧붙인다.

“어째서 포도주를 말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몽골 초원과 칭기즈칸을 오직 미적 대상으로만 보고자 한 관광객의 심리를 역이용한 포도주. 포도주는 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통렬한 아이러니였다.”

이처럼 이 책을 시종 일관하는 것은 바로 그 무엇이 바로 다름 아닌 오리엔탈리즘이다.

다음은 네팔의 카트만두. 그 곳 고서점에서 일본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의 소설 ‘이조잔영(李朝殘影)’을 발견한 저자. 조선 기와집 지붕이 표지 삽화로 들어간 문고판이었다. 그 책을 사들고 저자는 고대와 현대가 뒤섞이고 신들이 즐비한 거리를 헤매면서 긴 머리를 늘어뜨린 고행자의 모습, 화장장(火葬場)의 연기, 잿빛 강물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도 잠시, 저자는 ‘이조잔영’의 진짜 냄새를 맡는다. 1940년 경성(서울), 일본인 화가와 조선 기생 모델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 저자는 “소설 주인공에게 조선의 아름다움이란 그저 ‘여인의 아름다움’이었을 뿐. 그건 결국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아니었는가”하고 되뇌인다.

도쿄(東京)로 발길을 옮긴 저자. 그는 도쿄대 교양학부가 있는 고마바(駒場)에서 조선 예술 예찬론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36년 세운 일본민예관을 찾는다.

“야나기는 왜 조선 예술을 예찬했을까. 그가 석굴암을 예찬하고 ‘조선인은 예술적 기질을 지닌 기품있는 민족’이라고 떠드는 것이야말로 서양 제국주의자들을 흉내낸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아니었던가. 그건 서양에 대한 일본 예술 내세우기의 한 가지 변형에 다름 아니었다. ”

도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식민지시대 한국문학 연구에 평생을 매달려온 저자. 이 대목에서 그의 고뇌 어린 탄식이 가슴 찡하다.

“형(形) 색(色) 선(線)을 서열화해 형은 중국, 색은 일본, 선은 조선의 미로등급화했고 조선의 선을 비애의 예술로 보았던 야나기. 형 색 선, 과연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조선의 미란 서양(일본)이 멋대로 창출해 낸 헛 것에 지나지 않았거늘, 남의 나라 대학 서고(書庫) 속을 분주히 헤매었던 나의 외로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우리를 심란하게 하는 요즘,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책 곳곳에 펼쳐지는 저자의 해박함도 매력적이다. 그 한 대목.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란 종자에겐 세 가지 낭비(사치)가 주어져 있다고 했다. 먹기 섹스 그리고 죽음. 앞의 둘은 누구나 아는 상식. 문제는 죽음. 죽음이야말로 인간 종자의 가장 철저한 사치라는 것. 여로란 그 끝에 죽음이 있지 않겠는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겠는가.”

몽골 초원, 저자의 독백이 여행의 의미와 함께 삶의 철학으로 다가온다. 그건 저자의 내면의 목소리다. 문학 하나에 매달려, 쉼 없는 열정을 바쳐온 한 문학사가의 내면 풍경이 감동적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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