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magazine]美 '도덕적 자유'의 시대로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6분


‘거짓말로 둘러대야 하나, 아니면 진실을 털어놓아야 하나.’ ‘나의 결혼서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유혹의 손길이 다가올 때 여기에 굴복해야 하는가.’

예전에 미국인들은 이런 도덕적인 문제의 답을 구할 때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확립된 도덕적 규칙들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착하고 도덕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개인이 직접 결정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때 기존의 도덕적 권위에 기대는 대신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미국은 항상 자유로운 나라였지만 ‘도덕적 자유’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9세기에는 ‘경제적 자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정치적 자유’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인간의 활동 중에서 극히 제한된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반면 도덕적 자유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모두 아우른다. 도덕적 자유라는 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초월적인 존재조차 이제는 진짜 인간들의 필요에 맞게 자신의 규칙들을 수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 대부분의 서구 사상가들은 인생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도덕적 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회, 군주, 법, 혹은 자연의 권위를 인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존 로크나 임마누엘 칸트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로크나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이미 존재하는 종교적 윤리적 계율을 그 틀로 삼았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적이고 절대적 가치인 도덕은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자유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뤘다.

그런데 1960년대와 70년대에 일부 사상가들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덕적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응을 보여 마침내 도덕적 권위에 대한 의미심장한 도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적 자유라는 급진적인 개념에 대해 반대가 없을 리 없었다. 지금도 1960년대의 유물이 미국 사회를 부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기존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고, 전통으로부터 단절되고, 가족이나 신앙에 애착이 없는 사람들이 도덕적 자유를 받아들였지만 결국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주장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호응을 얻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2년여 동안 연구팀과 함께 착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조사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정직, 성실성, 용서, 자기절제 등 네 가지 도덕적 미덕에 초점을 맞췄다.

성(聖) 오거스틴은 거짓말은 언제나 나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연구의 응답자들은 낯선 사람보다 친구에게 정직해야 할 의무가 더 크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사람을 정직하게 대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직이 때로는 악덕이 될 수도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심리치료사는 “상대에게 온갖 끔찍한 말을 퍼붓고 나서 그냥 정직하게 말했을 뿐이라며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정직성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 기술자는 결혼생활의 성실성 문제를 마치 다루기 힘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처럼 보고 있었다. “결혼생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져버렸는가, 아니면 아직 수리가 가능한가? 부부가 한 팀이 되어 과거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존재하는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한 여성은 용서가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는 죄인들조차 선하게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가 우리를 제자리에 붙들어두고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자기절제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이오와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은 “자기 절제가 나쁜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며 “가족을 무시하고 일주일에 70∼80시간씩 일하는 것이 좋은 자기절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좋은 자기절제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아에 대한 의무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번 연구의 응답자들 중에는 때로 마음껏 즐기는 사람이 강박적인 일중독자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도덕적 자유의 시대에는 도덕적 권위를 갖는 사회기관들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가 좋은 예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신을 재정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 목사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끌어오고, 개혁성향의 유대인들은 성을 차별하지 않는 표현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는 미국의 종교기관들이 도덕적 자유의 무게 때문에 부러지는 대신 도덕적 자유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휘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회질서의 수호자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를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한다. 경제적 자유는 독립적인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사회 대신 대량소비의 사회를 만들어놓았다. 정치적 자유는 계몽된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참여 대신 유권자들의 정치 무관심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자유 덕분에 진지하고 냉정한 판단력으로 자율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생겨날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도덕적 자유는 이제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도덕적인 사회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대신 도덕적 자유를 하나의 도전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필자〓앨런 울프(보스턴칼리지 정치학 교수·‘도덕적 자유’의 저자)

(http://www.nytimes.com/2001/03/18FREEDO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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