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람·세상]"수담(手談)의 오묘한 맛에 삶이 더욱 재미"

  • 입력 2001년 3월 21일 18시 38분


98년 7월 서울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 비행기가 이륙한 뒤 안전벨트 해제 신호가 들어오자 두 신사가 자석 바둑판을 꺼냈다. 이후 이들은 7시간반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20여판의 바둑을 뒀다. 나이 들어보이는 한 신사는 바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였고, 다른 신사는 총리 비서실장이었던 조건호 무역협회 부회장(57).

“저나 총리나 모두 속기였어요. 또 둘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죠. 아랫 사람이니까 윗사람에게 져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뻔히 보이는 수를 놔두고 딴데 두는 걸 스스로가 용납못해요. 그래서 엎치락 뒤치락하며 20여판이나 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99년초 이창호 9단과 목진석 5단을 총리 공관에 불러 대국을 벌이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조 부회장은 서울대 법대 2학년 때 바둑을 배우자 마자 푹 빠졌다. 단시간내 약하나마 1급 수준까지 올라갔다. 이후 고시 공부(66년 행정고시 합격)에 바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틈을 쪼개가며 바둑을 뒀다.

90년대초 그의 바둑이 한 단계 도약한다. 40여개 정부 부처가 모두 참여하는 바둑 대회가 열린 것. 당시 재무부 국장이던 그는 단체전에 출전할 선수들을 모아놓고 특별훈련을 실시했다. 매주 토요일 일과가 끝난 오후 2시, 과천 정부청사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선수 5명이 모두 밤 10시까지 바둑 공부를 하도록 한 것. 이 특훈은 3개월 동안 계속됐다.

“저도 그 때 사카다의 묘(妙) 시리즈 10권을 두 번 독파하며 바둑을 깨친 것 같아요. 물 1급에서 확실한 1급이 된거죠. 고시 공부하던 식으로 바둑 공부를 했으니까….”

뭐 하나라도 똑부러지게 해야한다는 열정 덕분에 재무부 팀은 예상을 뒤엎고 준우승을 했다.

조 부회장의 바둑 인맥은 보통이 아니다. 정해창 전 법무장관 등 100여명의 회원을 가진 바둑 서클 ‘소현제’의 열성 멤버에다 대학 동기 바둑모임인 ‘오석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보건복지부 장석준 차관과는 오랜 호적수.

최근 한국기원 이사장에 취임한 허동수 LG칼텍스 부회장으로부터는 한국기원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바둑은 겉으론 조용합니다. 하지만 그 속엔 격렬함도 있고, 부드러움도 있고, 느리고 빠른 것도 있고…. 온갖 게 다 들어있죠. 만약 바둑의 오묘한 맛을 몰랐다면 삶의 재미가 덜했겠죠.”

그의 꿈은 은퇴한 뒤 조그만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친구들을 불러 수담을 나누는 것.

“나이가 먹을수록 더 즐거워지는 취미가 바둑인 것 같아요.”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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