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의약분업 전사들’ 어디갔나

  • 입력 2001년 3월 20일 18시 33분


어제 의과대 특강을 마치고 나오면서 내 마음은 착잡했다.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미래의 의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의보재정의 고갈과 의료체계의 총체적 파탄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 의약분업의 조기실행을 주장했던 그대들은? 의사의 직업적 정체성을 막무가내로 죽이고 도덕적 명분으로 날카롭게 간 정의의 칼을 마구 휘둘러댔던 그대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고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안심시켰던 그대들, 의약계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모든 죄를 전문가집단에 전가했던 시민단체들, 그대들은 지금 의보재정이 거덜나 한국 의료계가 총체적 파탄에 직면한 이 때 왜 침묵하고 있는가?

▼환자증가―고가약 예측 실패▼

의재(醫災) 약재(藥災) 재정고갈의 3재가 결국 국민건강을 결딴낼 것이라고 경고했을 때, 의약분업의 정당성을 훼손한다고 으름장을 놓던 그 패기만만하던 관료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그래도 의보재정 위기 앞에서 의사와 약사들의 집단이기주의만 탓할 텐가? 의사와 약사들의 부정과 비리를 감독하면 의보재정이 정상화될 수 있다고 강변할 텐가? 마치 이교도들을 징벌하러 떠나는 십자군처럼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으며 진군했던 ‘분업동맹’은 지금 왜 침묵하는가?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대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사안이 너무 시급하기에 지혜를 모으자. 의보재정 위기의 원인은 의약분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가 남발한 보험급여 인상, 늘어난 환자, 복제약의 퇴장과 오리지널 약의 시장 지배 등 세 가지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재정 위기의 삼총사다. 의사에게 지급되는 보험급여의 폭증만으로 이 정도의 재정위기가 오지는 않는다.

더 큰 원인은 환자의 증가와 고가약의 시장지배에 있다. 문제의 근원은 이 두 가지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정책입안자, 의료지식인, 시민단체들은 물론 의사들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국민건강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정책을 기획하면서 의료기관 이용횟수의 폭증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기왕이면 안전하고 효과가 탁월한 약을 일사불란하게 처방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치 못한 실수의 대가를 국민 모두가 치르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의사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에 매몰돼 재정 정상화라는 의약분업의 최대 목적을 잊었던 것,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실수였다. 90년대에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연금개혁과 의료개혁으로 골머리를 앓은 이유가 바로 재정위기의 조기 해결에 있었다는 평범한 상식을 유독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자신들의 구호에 도취돼 망각한 대가다.

나는 사실 그들에게 매년 4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책임지라고 외치고 싶지만 마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국민 모두의 책임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연대보증을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에서 우선 단기적인 처방은 금물이다. 다급해진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방안들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므로 제발 조용히 있어 주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재정위기의 근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찬찬히 따져보기 바란다. 의약분업은 한국 의료 현실의 모든 모순을 짐지고 있는 작은 징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주기 바란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다.

▼성급한 응급처방은 금물▼

정치권은 서둘러 이 사태를 진화하려고 허둥대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넉넉잡고 2년 동안 정부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금융구조조정에 150조원을 투입하고, 영재학교 신설에 10조원을 투입할 의향이 있는 정부가 국민건강을 수호하는 데 매년 3조원을 투입하기를 꺼린다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차등수가제, 의사와 약사들에 대한 감시 강화, 병원 문턱 높이기 등의 임기응변으로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비용을 국민에게 전가해서도 안 된다. 작년 한 해 동안 2∼3배의 의료비 부담을 국민에게 지우고도 다시 의료비 인상을 기획한다면 정부는 이제 국민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의료현장을 지키는 전문가들에게 방법을 구해 보라. 그들이 재정위기를 스스로 막겠다고 의로운 전사로 나설 때, 다시 말해 그들의 자율적, 도덕적 양심에 호소할 때 방법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 ‘서툰 개혁이 남긴 상처’가 너무나 깊다는 점일 게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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