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신간]어느 현상학자의 일기

  • 입력 2000년 12월 29일 19시 57분


◇딱딱한 철학 쉽게…이탈리아 현상학 길잡이

▽엔조 파치 지음 이찬웅 옮김

230쪽 9000원 이후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의 화가 세잔느가 줄기차게 연작으로 그렸던 ‘생트 빅트와르 산’을 보면 나중에 그린 그림일수록 복잡한 숲과 나무들이 대담하게 생략돼 있다. 뿐만 아니라 명암과 원근법 등 현실감을 주는 기법들도 무시되어 이 그림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온 아름다운 산의 풍경은 온데 간데 없다. 대신 산은 변치 않은 기하학적 형상인 원뿔로 축소된다.

이 책의 저자인 엔조 파치의 눈으로 보면 세잔느의 이런 태도야말로 현상학적 태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현상학은 일상적으로 보아온 모든 외양들을 거부하는 태도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회의적 태도를 현상학에서 ‘에포케’(판단중지)라고 부른다. 후설이 제시한 이 딱딱한 용어는 이 책에서 다양한 일상적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이 책이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먼저 이 책이 철학적 일기, 그것도 난해한 사상으로 소문난 ‘현상학’적 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전에 사르트르가 현상학을 실존주의로 각색한 소설 ‘구토’를 발표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난해하다보니 그가 쓴 철학서 ‘존재와 무’가 오히려 구토의 해설서가 돼버린 해프닝이 벌어졌다.

소설과 달리 일기는 자신과 대화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러다 보니 체계적인 철학서나 소설과 달리 저자 스스로가 현상학적 명상에 이르는 과정이 여과없이 솔직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현상학을 그나마 최초로 소개하는 책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으로 이탈리아의 현상학이 어떤 것인지는 종잡을 수조차 없다.

엔조 파치의 철학적 기획은 후설의 현상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해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도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찾을 만한 명시적 근거가 없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이 에포케(판잔 중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타인에 대한 적개심만을 얻었다면, 엔조 파치의 현상학적 에포케는 오히려 환경이나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조건이 된다.

나를 둘러싼 바다가 내는 리듬은 나의 리듬이며 적대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상학의 목적, 즉 텔로스는 이런 적대성이 제거된 상태, 즉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사회라고 그는 주장한다. 아마도 이 책에서는 이런 단편적 암시만을 통해서 그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딱딱하고 난해한 독일 철학서나 지나치게 과장되고 현란한 수사가 난무하는 프랑스 철학서에 신물 난 독자에게 새로운 철학적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책으로 권하고 싶다.

박영욱(철학박사·충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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