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데스크가 쓰는 반성문

  • 입력 2000년 12월 21일 18시 33분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북한에선 개고기를 ‘단고기’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최근에야 들었다. “개는 인간을 위해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단고기’로 부르도록 하라”는 고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지시 때문이다.

북한에 다녀온 한 전문가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자괴심이 들었다. 정치면을 책임지고 있는 데스크로서 그 정도도 몰랐을까. 자괴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커졌다. 우리는 북한을 얼마나 알고 보도하고 있는가.

미국의 기자들 중에는 연말이면 ‘반성문’을 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한 해 동안 자신이 썼던 글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되돌아보는 송년 칼럼이 그것이다. ‘반성문’은 경제부 기자들이 주로 쓴다. 주가(株價)나 경기예측에 관한 자신의 글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연말이면 대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쭙잖게 그들의 흉내를 내본다. 남북관계의 격변 속에서 우리가 다룬 많은 기사들은 과연 정확했고 공정했는가. 너나 할 것 없이 명백히 잘못 해석했던 몇 가지 일을 떠올리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잊고 싶다.

북한군의 실세인 조명록(趙明祿) 총정치국장이 10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평복차림이었는데 유독 백악관에 들어갈 때만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를 놓고 남측의 언론은 “북한 군부가 북―미관계 진전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맞는 해석이 아니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미국은 여전히 주적(主敵)이고 백악관은 제국주의의 본산이다. 미제국주의의 심장부에 들어가는 북한군 장성이 달리 무슨 옷을 입겠는가. 조명록의 군복은 말하자면 “미국, 웃기지 마라, 이 제국주의자들아”하는 무언의 시위요, 당당함의 과시였던 것이다.

북―미관계 급변 조짐이 보이면서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은 예의 ‘남한 소외론’이었다. 지난 40년간 우리의 머리를 짓눌러온 이 소외론은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과 미국이 한국을 따돌리고 평화협정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의혹으로 요약된다. 냉전의 유물인 ‘남한 소외론’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10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어김없이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론도 논리도 바뀌고 있다. 고려대 유병화(柳炳華)교수의 ‘연합군이론’은 그 중 하나다. 1943년 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시칠리아에서 바그돌리아 이탈리아군 총사령관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을 때 아이젠하워는 미국만을 대표했나, 아니다. 그는 연합국 전체를 대표했고 따라서 연합국들은 각자가 시칠리아협정의 당사국이었다.

한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6·25전쟁에서 싸웠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고 유엔이 이를 인정했다. 따라서 한국은 당연히 정전협정의 당사국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어야 상대도 믿는다. 스스로 냉전적 패배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무지와 편견으로 인한 부적절하고 불충실한 해석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어떤경우에는 그 숱한 북한전문가들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북한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많지 않지만.

새해에는 반성문을 안써도 되도록 해 볼 생각이다. 북한문제를 다루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이재호<정치부장>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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