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나연/정부 할일 따로 있는데…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8시 54분


14일 오전 1시 반. 서울 중구 명동 국민은행 본점 1층에선 노조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김상훈 행장이 30시간이 넘도록 갇혀 있는 행장실 앞에도 300여명의 노조원들로 가득했다. 노조원들은 “정부의 꼭두각시 김행장은 물러나라” “정부의 강제합병을 저지하자”고 외쳤다.

김행장이 전날 밤 “주택은행장과 합병 추진에 합의했다”고 노조측에 밝혔으나 이를 ‘자율 합의’로 여기는 노조원은 없었다. 노조원의 이런 ‘불신’은 바로 금융당국자가 심은 것이었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주 초 “다음주 우량은행간 합병을 공식 발표한다”고 밝히며 정부가 주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국민은행 합병 관련 사태는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되짚어볼 계기가 되고 있다. 정부가 금융구조조정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무리수’를 둔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도 부실은행 처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부실 금융기관의 존재는 자칫 신용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각을 하든 합병을 하든, 정부가 손발 걷고 나서서 하루빨리 부실요인을 없애고 금융시스템을 복원해야 한다. 민간기업인 은행에 공적자금을 쏟아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신용위기를 유발하지 않는 은행의 합병문제는 주주와 경영자가 오직 ‘경제적 판단’으로 알아서 할 일이라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외국계 금융컨설팅사의 한 이사는 “정부가 먼저 우량은행의 합병이 언제까지 이뤄진다고 발표하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현장에선 이번 사태가 다른 합병은행 노조의 연대투쟁으로 이어져 “자칫 부실은행 처리마저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김행장은 노조원들이 시너를 뿌리며 강경하게 나오자 합병논의를 일단 중단한다고 했고 노조측도 이날 오전 5시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농성이 끝난 후에도 이 은행 직원들의 얼굴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나연<금융부>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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