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교수의 희망열기]인문학이 살아야 미래가 산다

  • 입력 2000년 12월 10일 18시 37분


내가 어렸을 때 부친이 친구들과 나누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갈 때만 해도 변화가 왔다. 우리 선생의 얘기로는 외국어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보면 되는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라는 것이었다. 외교관이 되어서 국제무대에 서거나 문예 방면에서 일할 사람은 프랑스어를 해야 하고 자연과학이나 의학 약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활동을 하거나 비즈니스 사회로 진출할 뜻이 있으면 영어를 잘해야 된다는 설명이었다.

▼돈벌이는 안되는 학문 '찬밥취급'▼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필요한 외국어는 곧 영어로 바뀌고 말았다. 외교무대에 서기 위해서도 영어가 필수조건이 됐으며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는 물론 의학이나 약학까지도 영어 문화권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제는 영어가 외국어라기보다는 모국어보다도 더 필수적인 언어로 변해가고 있을 정도다.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해야 한다는 판도로 바뀐 셈이다.

만일 지금부터 100년이나 200년쯤 지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동양을 제외한 사회에서는 영어문화권이 중심이 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문화권이 남을 것이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슬라브문화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 것 같다. 동양에서는 중국문화권이 상당한 세력을 차지할 것이다. 많은 인구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문화권도 남을 것 같다. 지금도 중국학이나 고대 인도문화 연구에서는 일본이 가장 앞서 있을 정도다. 그밖에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문화권은 없을 것 같다. 우리 한국과 한글문화권은 어떻게 될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영향력은 상실한 채 남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어떤 위기의식까지도 금치 못하게 된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크게 말하면 인문학의 빈곤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사상에 관한 학문이다. 선진국들의 문예부흥이 바로 인문학의 맥락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재의 사회적 추세와 교육방침이라면 인문학을 둘러싼 모든 정신영역의 학문과 사상이 국제무대에서 사라질 것만 같아 보인다.

돈벌이가 안되는 학문은 새로운 지식사회에서 밀려나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과 학생들은 한국어보다도 영어를 더 잘할 수 있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일반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다.

교육정책도 그렇다. 중고교 교육은 수능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과정으로 전락해 버렸다.

높은 수능시험 성적을 받은 학생은 대학에 가지만 무엇이 학문이며 자기발견과 성장의 길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2의 수능시험인 고시공부에 열중해 버린다.

서울대 교무처장이 서울대는 대학이 아니라 고시준비학원이 돼버렸다고 한탄한 일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역사학 교수는 “사학과는 없어졌어. 그 애들은 고시 준비하는 곳이 대학이라고 착각하고 있어”라고 하소연했다. 이렇게 되면 교육부와 일류 대학들은 고급 공무원과 사상을 갖추지 못한 일꾼을 양산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한 사회와 민족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획일적인 가치관이다. 히틀러와 마르크스주의가 그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인문학과 문예정신이 빈곤해지면 획일적 의식구조를 극복하지 못한다. 사상과 정신적 창조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문예부흥 교육정책 절실▼

사람들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가장 에스키모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 참다운 세계적인 것이다. 선진국들은 그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문예부흥과 인문학적 발달을 통해 남겨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정신적 가치가 선행돼야 한다. 그 책임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정책과 대학교육이 아쉽다. 그 최대의 과제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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