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공적자금 탕진죄'

  • 입력 2000년 12월 5일 18시 41분


술자리가 무르익자 사업가 친구가 침울한 어조로 속마음을 털어놨다. IMF 사태 이후에 겪었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연일 터졌던 회사의 위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명의 종업원도 자르지 않고 지금까지 버텼다는 것, 극심한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대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 게다가 대우사태 때문에 십수억원이 물려 더 버틸 힘조차 없다는 것이 푸념의 골자였다.

푸념은 곧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꼬박꼬박 냈던 그 피같은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자금을 뭉터기로 쓰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며, 그러고도 수십만명의 종업원을 잘라내고 또 다시 공적자금을 요청하는 정부, 금융기관, 대기업의 부실(不實) 3중주에 넌더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혐오증은 비단 그 친구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110조 쏟고도 효과 없다면 …▼

정부 주도의 성장정책을 펴온 한국 같은 상황이라면 미국의 시장주의자들이라도 공적자금 투입을 반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업부실이 금융기관의 발목을 잡고 이것이 금융시장의 경색과 생산자금의 고갈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차단하려면 공적자금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적자금의 투입량이 점점 불어나면서 그것의 효과에 의구심이 들고, 급기야는 공적자금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쓰러지는 기업에 버팀목을 대기보다는 오히려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이 더 옳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우선, 110조원이 투입됐다면 국민이 그 효과를 어느 정도는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물경제지표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추가 투입될 50조원은 꺼지는 불을 지펴 이미 투입된 자금과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낼 것인지, 아니면 하강속도를 완화하는 정도에 그칠지는 미지수다. 정부도 기업도 확신이 없고, 국민은 미궁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둘째, 퇴출기업의 수가 너무 작고 그 원칙이 너무 방만하다. 웬만한 기업이라면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공적자금 규모를 늘리고 부실의 총량을 키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름도 없는 주변기업으로 가득 채워졌던 1차 퇴출기업 명단이 50조원의 추가 투입을 불러온 화근이라면, 이미 죽은 기업에 다시 퇴출을 명했던 2차 조치가 내년 상반기쯤 또 한 차례의 공적자금 투입을 논의하게 될 배경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는 바에야 기다려 볼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자금이 투입되는 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이 책임질 것에 대해서만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가계가 파탄나면 가족이 그 고통을 감수한다. 결코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 그런데, 공적자금을 공여받고도 부실을 연장한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으며, 정부도 아직 책임을 묻지 않았다. 1차 투입액 중 60조원이 회수불능 상태라는 진단이 사실이라면, 자금투입을 허가한 정책결정자는 공금유용죄를, 수혜자들은 공금횡령죄를 범했다. 위폐를 제조하거나 가짜수표를 만들어 유통시킨 사람은 금융질서 교란죄로 처벌받는다. 또 공무원이 100만원 정도의 공금을 횡령했다면 여지없이 형사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1조원의 공금이 어떤 부실기업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조원이라면 100만명의 공무원이 1인당 100만원 정도의 공금을 횡령한 액수와 같다. 공적자금이 새고 있는 기업현장, 공적자금의 고귀함을 모르고 여전히 정신 못차리는 부실 대기업의 고위경영진은 사정의 대상이 돼야 한다. 해당 기업의 노조도 기업 정상화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엄중하게 책임 물어야▼

60조원을 헛되게 쓰고도 경제사범이 한 명도 없다면 누가 정부를 믿고 세금을 내려하겠는가?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정부는 공적자금의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밝혔다.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나는 유례없이 가혹한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적자금을 받고도 기업정상화에 실패한 경영진은 재산을 몰수하고, 나아가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어 처벌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적자금 공여와 횡령의 차이가 없어진다.

송호근(서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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