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코리아로 가는 길]'생산자=소비자'주문시대 열린다

  • 입력 2000년 12월 4일 18시 28분


“미래에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 대신 프로슈머(PROSUMER)가 등장할 것이다.소비만 강요당하던 소비자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생산과정에 직접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게 된다. 이런 물결을 무시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다”

프로슈머.우리말로 굳이 옮긴다면 ‘생비자(生費者)’쯤으로 풀이할 수 있을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처음 제시할 때만 해도 생소하게 들렸던 ‘프로슈머’가 인터넷 시대를 맞아 기업 생존전략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도 일방적이 아닌,상호 소통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다.만드는 자와 구입하는 자의 양극단으로 나뉘었던 생산자―소비자간의 거리는 그만큼 크게 좁혀졌다.일방적인 ‘공급자’와 ‘소비자’는 점차 없어지고 있다.대신 서로가 정보와 가치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는 ‘생산자〓소비자’시대가 열리고 있다.

▽프로슈머의 거인 델컴퓨터〓1980년대 말 델이 사업을 시작할 때 델은 PC를 주문 생산해 통 신판매하는 중소 지역 사업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델은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급격히 성장해 90년대 후반에는 미국 최대의 PC 메이커가 됐다.

델의 제조 판매는 다른 회사와 정반대 순서다. 물건을 만들어놓고 나서 손님의 주문을 받는 다른 회사와 달리 델은 먼저 고객의 주문을 받는다. 소비자가 사양 기종 규격 가격 등을 결정하면 그 다음에 제조에 들어가는 식이다. 소비자가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종류는 160만가지에 달한다.

이같은 생산 판매 방식은 델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무엇보다 재고수량을 최소한으로 낮췄다. 이는 내부 온라인 시스템을 강화하고 주요 대형 고객, 부품업자를 인트라넷으로 연결함으로써 가능했다. 낮은 재고율은 90년대 초반 CPU, 메모리 등 반도체 가격의 급격한 하락 에서 재고 평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됐다.

다른 PC제조업자의 경우 유통망 유지 및 관리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데 반해 델은 이 시간의 대부분을 고객에게 돌렸다. 기업 고객의 방문과 수요 파악, 생산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에 그만큼 시간을 더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델의 영업사원은 60%의 근무시간을 기업고객과의 미팅에 썼다. 이는 다른 PC업체 평균의 2배가 넘는 것이었다. 따라서 델은 같은 수의 고객관리에 경쟁사보다 절반 이하의 영업사원만 필요했고 이는 그만큼의 비용 절감으로 이어졌다.

▽피할 수 없는 물결〓세계최대 온라인 증권사 찰스 슈왑의 성장세도 두드러진다. 지난 8월 31일을 기해 고객예탁금 이 1조달러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슈왑의 급성장에도 역시 인터넷을 통한 주문형 펀드 상품 개발에 있었다.

인터넷 골프용품 판매업체 ‘칩샷’은 주문생산제를 복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칩샷은 자체상표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에게서 클럽헤드 그립 샤프트 스타일을 개별 주문받은 뒤 일주일안에 제작 배달해준다.

프로슈머의 물결은 ‘전방위적’이다. 제조업 뿐만 아니라 문화산업에까지 프로슈머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미국의 메이저영화사인 20세기폭스사는 이미 “프로슈머 시대에 더 이상 모든 소비자가 똑같이 울고 웃는 대중 대량 매체란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미국의 독립영화제들, 유럽의 크고 작은 대부분의 영화제는 비디오코너를 확대하는 등 프로슈머를 도입하고 있다.

사실 프로슈머가 인터넷 시대에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독일의 자동차 메이커인 BMW도 이미 오래전부터 ‘주문생산’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색깔 엔진 배기량을 고객이 사전에 지정하게 해 거기에 맞춰 차를 생산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방식은 소수의 부유층 소비자를 겨냥한 것이었을 뿐이다. BMW는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 이를 보편적인 판매―제조 방식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기업들은 프로슈머를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맞춤형이 좋은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이를 채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가령 자동차회사가 맞춤제작 방식을 도입하자면 먼저 조달부품과 디자인 색상을 단순화해야 한다. 또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간에 완벽한 정보 네트워 크를 구축해야 한다. 게다가 기존 딜러들의 저항을 이겨내는 것도 숙제다.

청바지 회사인 기업 리바이스가 주문맞춤을 도입했다가 1년만에 포기한 것도 기존 오프라인 유통업체의 저항 때문이었다.

델 컴퓨터의 경우도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주문판매로 비용은 낮췄지만 반대로 유통점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A/S를 제공하기 어려웠고 이것은 고객의 불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환경을 잘 활용한 델조차 아직 완전한 프로슈머 정착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전문가 기고

최근 인터넷을 활용해 소비자를 상품 설계에 직접 참여시키는 사업모형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맞춤형 제품 서비스는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어 그 확산이 기대되고 있다. 특히 이 사업모형을 적용하기 쉬운 분야는 디지털화가 가능한 제품들이다. 소프트웨어 음악 책 뉴스 금융상품 등과 같이 비트(bit)로 표현이 가능한 제품들은 맞춤형으로의 전환에 장애물이 거의 없다. 이런 제품들은 다양한 조합으로 재생산이 쉽고 그것에 소요되는 비용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 산업에 속하는, 디지털화가 불가능한 제품들(자동차 옷 음식 등)은 맞춤형 제품 서비스의 제공이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제품들의 설계에 고객을 참여시키는 경우, 수백만 가지의 부품들을 생산해야 하고 이들의 생산 관리비용이 급증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악화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핵심 요소는 부품의 표준화와 모듈화이다. 초기의 컴퓨터 산업은 표준화와 모듈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컴퓨터 기종을 개발할 때마다 부품을 새로 설계해야 했고 개발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 개발비용을 줄이고 설계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60년대에 IBM에서 처음으로 대형 컴퓨터인 시스템/360에서 모듈화를 시도하였다.

즉, 기종이 다르더라도 같은 부품으로 설계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표준화와 모듈화는 PC 시장의 출현으로 더욱 가속화되었고 오늘의 델이 나올 수 있는 산업구조를 탄생시켰다. 표준화와 모듈화는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생산단가를 낮추는 이점도 있다. 표준화와 모듈화가 잘된 산업에서는 부품 생산업체들이 부품별로 대량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생산 단가가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표준화와 모듈화가 잘된 산업이라고 다 맞춤형 제품 서비스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맞춤형 제품 서비스에 성공하려면 인터넷을 통해 협력업체와 구매 정보를 공유하고 수요의 변화에 즉각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 시대에는 ‘빛의 속도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제 호<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jlee@ksgm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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