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최재천/기초과학 육성 정부가 할 일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8시 24분


생명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로서 진화생물학적 개념을 가지고 기초학문의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서양의 학문과 사상체계를 떠받쳐온 것은 플라톤의 본질주의였다. 그에 따르면 삼라만상에는 영원불변의 본질이 있고 사물은 그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도 같이 진리의 불완전한 투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변이란 진리의 전형을 흐리게 하는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언뜻 불완전해 보이는 변이가 실제로는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처음 일깨워준 이가 바로 찰스 다윈이다.

닭은 참으로 묘한 동물이다. 알이란 번식할 때만 만드는 것인데 무슨 동물이 매일 한 개씩 알을 낳는단 말인가. 닭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특별히 알을 잘 낳는 닭만 오랫동안 인위적으로 선택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닭들간에 그 같은 변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가 이상하리만큼 섹스에 집착하는 연유도 다 변이 에 있다. 유성생식은 무성생식에 비해 단기적으로는 엄청나게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물이 유성생식을 하는 이유는 유전적으로 다양한 자식들이 태어나야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강한 자연선택이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필요에 따라 변이를 주문할 수는 없다. 섹스는 그저 다양하게 변이를 창조할 뿐이다.

기초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이 변이를 만들어줘야 기술이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이 미래를 예견할 수 없듯이 기술도 장차 무슨 과학지식이 필요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써먹을 수 없는 ‘배부른 연구’는 국민소득이 더 높아진 뒤에나 하라는 사람도 있다.

자연선택이 만일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메커니즘이었다면 지구의 생명은 지금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를 예측한답시고 필요한 것만 주문해 챙기다보면 급변하는 환경에서 성공은 고사하고 낭패를 보기 일쑤다. 인간 기계문명의 역사도 언제나 모범적인 변이의 도움만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인문학자와 기초과학자에게 ‘능동적 가치’를 생산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기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능동적 가치를 생산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기초학문이 아니다. 기초학문을 하다보면 저절로 그런 가치가 발생할 뿐이다. 기초는 그저 순수하게 지식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응용은 그 지식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 쓰도록 한 것이다. 기초를 응용의 시녀로 만드는 것은 봉사가 제 닭 잡아먹는 격이다.

그래서 인문대학과 자연대학에는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학과들이 필요하다. 하버드대가 시장 논리를 몰라서 기초학문 학과들을 다 붙들고 있는 줄 아는가. 대학이 기초학문을 놓으면 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게 좋다지만 기초학문 육성은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최재천(서울대 교수·생물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