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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19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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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에 오르내릴 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많더니 퇴출 결정이 난 뒤에는 전화마저 뚝 끊겼다고 했다. 어쩌다 잘못 걸린 전화 한 통이라도 받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임원들이 먼저 그만두고 옆자리도 하나둘씩 비어가는 사무실에서 아무 할 일 없이 책상을 지키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법정관리 상태에서 나가면 퇴직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 ‘갈 데도 없는데 좀더 버텨볼까’ ‘이달부터 월급이 안 나오면 생활비는 어떡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10년 전 입사할 때만 해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대기업 중에서도 괜찮은 봉급에, 남보다 쉽게 내 집 마련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의 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임원들이 사업에 신경쓰기보다 오너의 사생활이나 비자금 문제가 보도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때로는 오너의 스캔들이 실린 잡지를 수만부 사서 한밤중에 불태우기도 했다. 그 모두 은행에서 비싼 이자 주고 얻은 돈으로 한 일들이었다.
장부에는 수백억원짜리 자산이 실제로는 몇십억원밖에 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현장 노임을 부풀려 계상해 비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로비해 공사를 수주하고, 공사는 부실로 이어지고, 사고가 나면 회사가 흔들리고….
그때는 기업이란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결국 그런 일들이 수천명 직원들과 수만명의 협력업체 직원들을 거리로 나앉게 하는 원죄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반문했다. “투명하지 못한 경영과 엉뚱한 일에 내몰리는 임원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우리 회사만의 일이겠느냐”고.
<신연수 경제부기자>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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